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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속으로 고대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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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 세대의 헤브라이인

 

 

 

 

▶가나안 철기 시대 (기원전 1150-587년)

 

 


후기 청동기 시대에는 고지대에 약 25개 정도의 마을이 있었지만 1차 철기 시대 말에는 300개 이상으로 증가했고 정착 인구는 20,000명에서 40,000명으로 두 배가 되었다.마을은 북쪽에 더 많고 더 컸으며 아마도 유적을 남기지 않은 목가적 유목민과 고원을 공유했을 것으로 추측돠었다.고지대 마을의 도자기는 저지대 가나안 지역의 도자기보다 훨씬 제한적이지만 유형적으로는 이전의 가나안 도자기에서 발전했다.발국조시단은 1967년까지 팔레스타인 서부 고원지대에 있는 이스라엘의 심장부가 사실상 고고학적 미지의 땅 이었다고 설명했다 . 그 이후로 유다 지파. 베냐민 지파.에브라임 지파. 므낫세 지파의 전통적인 영토를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이러한 조사는 철기 시대 초기에 이스라엘 땅에 존재했던 블레셋과 가나안 사회와 대조되는 새로운 문화의 갑작스러운 출현을 드러냈다[.이 새로운 문화는 돼지고기가 부족하고  고도로 장식된 도자기를 사용하는 블레셋과 가나안 관습을 포기하고 할례를 시행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은 출애굽과 그에 따른 정복 이 아니라 기존 가나안과 블레셋 문화의 변형에서 비롯되었다.모두 몇 세대에 걸쳐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빽빽한 고원 촌락의 유적 발견은 기원전 1200년경 가나안 중앙 산악 지대에서 극적인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음을 시사했다. 폭력적인 침략의 흔적이나 명확하게 정의된 민족 집단의 침투조차 없었다. 대신 라이프 스타일의 혁명인 것 같았다. 남쪽 유다 산에서 북쪽 사마리아 산에 이르기까지 인구가 희박했던 고지대에 와해되거나 와해되있던 가나안 성읍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약 250개의 산꼭대기 공동체가 생겨났다. 여기에 최초의 이스라엘인이 있었다.따라서 현대 학자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고지에 있던 기존 백성들로부터 평화롭게 내부적으로 발생했다고 본다.

 

 

 

광범위한 고고학적 발굴은 초기 철기 시대 동안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을 제공했다. 고고학적 증거는 마을과 같은 사회를 나타내지만 자원이 더 제한적이고 인구가 적다.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인들은 주로 작은 마을에 살았는데 그 중 가장 큰 마을은 인구가 300에서 400명 정도였다.그들의 마을은 언덕 꼭대기에 지어졌다. 그들의 집은 공동 뜰 주위에 무리지어 지어졌다. 그들은 돌 기초와 때로는 나무로 만든 2층이 있는 흙벽돌로 방이 서너 개 있는 집을 지었다. 주민들은 농사와 목축업을 하며 살았다. 그들은 산비탈에 테라스를 만들어 농사를 짓고 다양한 작물을 심고 과수원을 유지했다. 마을은 대체로 경제적으로 자급자족했고 경제적 교류가 만연했다. 성경에 따르면 이스라엘 왕정이 일어나기 전에 초기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재판관들 에 의해 인도되었다. 작은 마을은 성벽이 없었지만 그 지역의 주요 도시의 주체였을 가능성이 높다.다윗 왕은 기원전 10세기에서 9세기로 비정하는데 강한 왕권을 가졌다기 보단 유다의 소규모 부족의 족장 수준의 인물로 북부 이스라엘 왕국과는 무관하다고 본다.그는 기원전 10세기에 기브온.기브아 고원을 기반으로 급작스럽게 정치 세력이 형성되고 성서의 시삭인 쇼솅크 1세에 의해 파괴된 후 작은 도시 국가들로 분열되어 회귀하였다.일반적으로 현대의 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북부 이스라엘 왕국이 기원전 900년에 존재하고  유다 왕국은 기원전 850년에는 존재했을 것으로 본다. 이스라엘 왕국은 두 왕국 중 더 번영했고 곧 지역 강국으로 발전했다. 오므리 왕조 시대 이스라엘은 사마리아 . 갈릴리.요단 계곡 상류.샤론 및 트랜스요르단의 대부분을 통제했다. 사마리아는 레반트에서 가장 큰 철기 시대 구조물 중 하나의 본거지였다.

 

 

 

▶헤브라이이의 종교 

 

 

헤브라이인들의 전설.역사.법률.신의 계시 등을 총망라한 구약성서는 기원전 1200년 경에 시작되어 적어도 800 년 이상의 기간에 걸쳐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그 속에는 헤브라이 종교의 성장 과정이 반영되어 있다.야훼는 이 세상의 유일산이며 헤브라이인은 야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말하고 있다.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내려졌다고 전해지는10계명 은 헤브라이 민족에 대한 야훼의 도덕적인 요구들을 구체화한 것이였다.처음에는 야훼신을 숭배하기 위한 일정한 장소는 없었으나 솔로몬왕 치하에서 왕국이 중앙집권화됨에 따라 신전이 예배의 중심지가 되었다.이후 헤브라이인들이 두 왕국으로 분열된 후 북부의 이스라엘 왕국에서  왕과 백성들이 이교로 동화하자 야훼의 계명을 따르지 않을 때에 일어날 재난을 경고하며 도덕과 사회적 정의를 부르짖는 예언자들이 등장하였다.기원전 9세기 중엽 아합왕 때 엘리아는 왕후 에제벨의 이교도 신전 건축 반대애 나섰고 에레미아(기원전 626-580)는 헤브라이 민족의 죄악에 대한 야훼의 벌로 예루살렘의 붕괴를 예언하기도 했다.또한 헤브라아인들의 바빌론 유수 기간 동안에는 에제키엘 등 여러 예언자들이 나타나헤브라이인들의 신앙 생활을 지도해 나갔다.바빌론에서 풀려나 예루살램으로 귀환하자 예언자 에즈라는 모세의 5경에 기초를 둔 율법을 성문화하여 발전시켜 나갔는데 헤브라이인들은 이 율법을 후대에까지 엄격하게 지켜나가고 있다.실제로 헤브라이인의 문화 중에서 종교를 제외하면 후대에 기친 영향은 별로 없다.그러나 기독교가 서양문화의 기본적 요인으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볼때 서양문화에 관한 한 헤브라이 종교는 오리엔트 문명의 유산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으로 평가 받을만 하다고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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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

 

 

 

 

헤브라이인들은 농경 민족으로 예루살렘이나 사마리아 같은 왕궁과 사저 외에는 농촌 지역이었다. 농촌은 점점 분산되어 최소 300명에서 최대 500명까지의 인구를 가진 촌락이 되었고 멀리 떨어져 한 가족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집단도 적지 않았다.이렇게 헤브라이 공동체는 적은 수의 구성원을 가진 공동체로 성장하였다.가나안 사람들은 중기 청동기 시대  기원전 2100에서 1550년 경으로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다.후기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1550에서 1200년 동안에 가나안의 대부분은 이집트 신왕국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을 형성했다.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로 가나안은 혼란에 빠졌고 이집트의 지배권은 완전히 무너졌다.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1200년경의 고대 이집트 비문인 메르넵타 석비에서 처음 언급된다.이스라엘인의 조상은 이 지역에 뿌리를 둔 고대 셈어를 사용하는 민족으로 추정된다.현대 고고학 기록에 따르면 이스라엘인과 그들의 문화는 가나안 민족과그들의 문화에서 발전된 독특한 단일신 신앙을 통해 분리되었다.이들은 성서 히브리어로 알려진 고대 히브리어를 사용했다.기원전 1200년경 무렵 기후 변화와 사회 변화로 인해 고원 지대에서 유목 생활을 하며 도시인들에게서 곡물을 사먹던 유목민들이 도시들이 쇠락하자 곡물을 자체적으로 생산해야 됨으로서  정착 생활로 바꾸어 정착하게 된 것이 이스라엘의 시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유목민이 주류였지만 가나안의 도시 왕국들에서 이탈한 사회 하층민 계층 하비루 역시 초기 이스라엘의 일부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이스라엘이 메르넵타 비문에 등장한 시기인 기원전 1200년경과 비슷한 시기부터 블레셋 사람들은 남쪽 해안 평야에 정착했다.헤브라이 왕국은 다윗왕의 아들 솔로몬(기원전 961-922 년)왕 치세에서  가장 큰 번영을 누렸다.페니키아의 항구 도시인 튀르와 동맹을 맺고 당시 페니키아 왕 히람1세는 예루살렘의 성곽.궁전.사원 등의 건립을 후원하였다.대신에 히람1세는 예루살렘을 통과하여 홍해로 진출할 수 있었다.그로 인해 예루살렘은 교역의 중심지로 번영하게 돠었고 홍해 근처의 구리 광산을 히람1세와 공동으로 개발하면서 왕실의 재정도 나날이 풍족해졌다.솔로몬왕은 통일 왕국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 전통적인 부족 체제를 해체하고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로 개편하자 각 부족들의 강력한 반발을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무리한 세금을 징수하였다.이러한 일들은 솔로몬왕이 생존해 있는 동안은 그런데로 지속되었으나 왕이 사망하자 그 모순은 노골적으로 드러나 사회적 불안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북부의 부족들은 솔로몬왕의 아들 르호보암이 새롭게 즉위하자 강제노역과 세금을 줄여달라고 요구하였다.그러나 르호보암은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고 오히려 더 큰 압박을 가하였다.북부의 10개 부족은 사마리아 시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새로운 국가를 세웠다.반면에 남부의 두 부족은 여전히 예루살렘의 왕에 대한 충성을 계속하였는데 이 국가를 유다 왕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헤브라이인들은 이 두 왕국으로 갈라져 싸움을 거듭했으나 이스라엘 왕 아합과 유다 왕 요사파테가 동족간의 분쟁이 무익함을 깨닫고 동맹을 맺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이 두 왕국은 9세기 당시에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여러 강대국들간의 세력 균형으로인해 독립을 유지해 갈 수 있었다.그러나 다음 세기에 이르자 세력들의 균형이 무너지며 앗시리아가 새로운 패자로 등장하면서 결국 기원전 722년에 이스라엘 왕국을 정복하여 중심도시인 사마리아를 파괴하고 이스라엘 지도자를 포로로 잡아갔다.한편으로는 남부의 유다 왕국은 앗시리아의 속국으로 전략하였지만 공식적으로는 독립을 유지하였다.이렇게 강세를 떨치던 앗시리아도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네부카드네자르 왕에 의하여 정복돠고 말았다.유다 왕국은 신바빌로니아 왕국에 처절한 저항을 벌였으나 기원전 586년에 붕괴되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바빌론에 끌려가 억류 생활을 하게 되었다.이로서 사울왕에서 시작된 헤브라이 왕국은 붕괴되고 말았다.포로로 잡혀간 헤브라이인들은 페르시아  왕 키루스가 신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후 인 기원전 539년에야 예루살렘에 돌아올 수 있었다.헤브라이인들은 바빌론에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전통을 고이 간직하였다.팔레스타인에 돌아온 이 후로는 점차 부족주의를 버리고 유다족을 중심으로 굳게 단결하였다.이후로 헤브라이인들을 유다인으로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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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된 땅과 헤브라이인

 

 

 

 

 

 

헤브라이인의 기원이나 역사에 대해서는 구약성경이 그 기본적인 자료가 된다.헤브라이인들과 그들의 시조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로 들어건 것은 기원전 3000 년 경으로 보인다.여러 민족들의 칩입과 교체가 계속되는 시기에 아모리인과 연관성이 있는 부족 헤브라이인들도 이 시기에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헤브라이인들은 기원전 1700년경에서 1600년 경에 약속된 땅 팔레스티나 지방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이주가 시작되었다.구약성경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땅의 놀라운 비옥함.축복.영적 풍요로움을 상징한다.이 구절이 처음 언급된 곳은 구약성경 출애굽기 3장 8절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풍요와 희망의 땅으로 인도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구절이다.성경에서 우유는 영양과 순결을 상징하고 꿀은 달콤함. 즐거움.자연의 풍요로움을 상징한다."젖과 꿀"이라는 문구는 구약성경에 약 20회 등장하며 하나님의 공급과 영적 성장.그리고 하나님의 백성과의 신실한 언약을 상징한다.가나안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케나안에서 유래한 코이네 .그리스어 카나안 과 라틴어 카나안에서 전래되었다.가나안은 이집트.힛타이트.미탄니.아시리아 등의 세력권이 겹치는 곳이었기에 청동기 말기 아마르나 시기에 대단한 지정학적 중요성을 띠었다.가나안이라는 명칭이 최초로 기록된 것은 성경이 아닌 기원전 18세기 쐐기 문자로 기록된 마리 문서이다.가나안에 관한 현대적 지식들은 텔 아조르.텔 메기도.엔 에수르.게제르 등지의 발굴조사에서 비롯한 것들이다.헤브라인들의 이집트 억류는 이집트왕 메르엔프타의 전승비에서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다.헤브라이인들의 지도자 모세가 기원전 1300년경 이집트 삼각주 지대에서 대대적으로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하게 된다.바로 구약성경에 나오는 출애급기이다.

 

 

 

 

헤이브라이인들이 약속된 땅 가나안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그 곳에는 많은 원주민들이 정착해 있었다.헤브라이인들은 무력으로 가나안의 도시들을 공격하였다.당시에 이집트는 해적 집단인 팔레스타인들의 침입으로 가나안 지역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던 때라 헤브라이인들의 정복사업은 비교적 용이했다.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에 이르러 팔레스티나 전역을 장악하고 12개 부족이 정착하게 되었다.헤브라이인들은 그들의 신 야훼만을 유일신으로 믿고 다른 민족들의 신들은 모두 배척하였다.따라서 처음에는 해브라이인들의 이러한 종교적 차이로 정치적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각 부족마다 군사적.종교적 지도자인 사사들이 그 부족들을 다스렸다.기원전 1020년 경에 이르러 사사 사무엘에 의하여 헤브라이 왕국 최초의 왕 사울이 선출되어 정치적 통합이 이루어졌다.당시의 헤브라이인등이 차지하고 있던 약속의 땅은 구릉지대에 머물러 있었다.팔레스티나 해안지역은 여전히 셈족 계통의 해적 집단인 팔레스타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정치력과 군사력을 통합하여 강력한 왕권을 확보한 헤브라이왕국 사울왕은 전투에서 상당한 무훈을 세웠다.그러나 그는 도량이 좁고 질투심이 강한 왕이었다.심한 노이로제 증세까지 보였기 때문에 지도자로서 미흡함으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왕은 길보아산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스스로 자결하고 말았다.이때의 전투에서 국토의 대부분을 팔레스타인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이때에 등장한 인물이 다윗이었다.다윗은 사울왕의 부하로서 전투에서 많은 무훈을 세워 백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아가자 사울왕의 미움으로 쫓겨나 헤브라이 왕국 남부지방에 피신해 있었다.다윗은 남부와 북부의 모든 부족들을 규합하여 팔레스타인들을 모두 물리치고 국토를 회복하였다.다윗은 왕국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정하고 요르단강 동쪽 지역과 다마스커스를 포함한 시리아 일부지역까지 세력을 확대하였다.이후로 예루살렘은 헤브라이인들의 유일한 신 야훼 숭배의 중심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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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키아 알파벳의 창안

 

 

 

 

동쪽은 유프라테스강과 아라비아 사막에 접해 있고 남쪽은 시나이 사막과 서쪽은 지중해  북쪽은 레바논 산맥에 둘러싸인 시리아 지역도 중동의 초기 문명의 중심지였다.티크리스 유프라테스강과 나일강 사이의 지리적 위치는 문명발전에 크게 유리했다.이곳은 특히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이 지역 내의 주요 하천인 오론테스강을 중심으로 내륙지방의 해상교역이 활발했으며 해안의 굴곡이 커서 좋은 항구가 생겨났다.그러나 이렇게 교통의 요지라는 점에서 다른 곳에 비해 외적의 침입을 받을 여지가 많았다.여리고인과 페니키아인들이 이 지역 문명의 서막을 올렸다.이들은 셈족 계통 아모리인의 지배를 받다가 기원전 1550년 경 이후에는 후리인의 지배를 받았다.후리인들의 마탄니 왕국은 힛타이트 왕국과 이집트사이의 완충지대를 형성하며 발전해갔다.유프라테스강 상류에는 카르케미쉬라는 도시가 있었으며 서쪽으로는 페니키아의 도시들이 번성하였다.그 중에서 우가리트는국제적인 상업 중심지이자 에게 해의 그리이스인들을 위한 동방으로의 출구였다.우가리트는 기원전 1200년 경 철기 무기를 쓰는 외부의 침입자들에 의하여 파괴되고 대부분의 지역이 황폐화되었다.세월이 흐르면서 철기 문화가 유입되어 새로운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페니키아의 경우 철기사용 민족의 침입에 의한 충격에서 비교적 빨리 회복되어 청동기 문화의 소멸과 함께 우가리트는 역사속에서 사라지고 튀르라는 도시가 주요 무역항으로 성장하였다.기원전 11세기에 이르기까지 페니키아의 함선들은 지중해 도처를 항해하며 해안을 따라 몇몇 중요한 무역항들을 세웠다.따라서 이들 페니키아인들의 활동을 통해 오리엔트 문명이 지중해 영역 내에 전파되었다.

 

 

 

 

특히 기원전 969년에서 936년까지 재위했던 히람 1세의 치세 하에서 튀르는  최고의 번영을 누렸다.헤브라이의 솔로몬왕과도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다.또한 칼타고에 식민지를 세우기도 했다.오늘날의 튀니지아의 일부인 칼타고 식민지는 북아프리카 해안에 건설되어 본국 보다 더 큰 번영을 누렸다.페니키아인들이 인류문명에 가장 크게 공헌한 것은 알파벳의 창안이었다.본래 상업국가였던 페니키아에서 상업적 실용성에서 볼 때 설형 문자는 너무 번거스러웠다.따라서 페니키아인들은 상업 활동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하여 쓰기에 편리한 표음문자인 알파벳을 고안했던 것이다.이 페니키아 문자는 그 후 그리이스로 전해지면서 오늘날 알파벳의 기원이 되었다.기원전 12세기 경에 이르러 시리아 지역을 지배한 민족은 아랍인이었다.시리아 북부 지역에서는 시리아 및 힛타이트계통의 왕국들이 여전히 남아 번영을 누리다가 기원전 8세기 경 앗시리아인들의 정복으로 인하여 지배당하게 되었다.페니키아인들이 해안지방을 따라 상업주도권을 차지하는 것과는 달리 아랍인들은 내륙지방의 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다.사막을 가로질러 대상로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던 수도 다마스커스는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주요 교통 수단으로 낙타는 바빌로니아와 시리아 내륙 지방의 통상에 있어 필수적인 것이였디.이러한 아랍인의 영향력은 후대까지 남아 그들의 언어가 훗날 로마제국 시대에 들어서도 중동 지방의 주요한 상업어가 되기도 했다.팔레스타인들은 이집트의 라메수 3세에 의해 쫓겨나 가자나 아스칼론 등과 같은 해안 지대에 정착하였다.팔레스타인들의 기원은 매우 모호하며 그 문명은 미모아.에게 해 또는 소아시아적인 요소들을 다양하게지니고 있었다.팔레스타인들은 이미 내륙지방에 정착했던 헤브라인들과 빈번하게 충돌하면서 지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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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왕국 힛타이트 제국

 

 

 

 

 

 

 

 

터기공화국의 수도 앙카라에서 150 킬로미터 정도 동쪽에 위치한 곳에 보가즈쾨이 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좁은 산골짜기에 있는 마을 " 이라는 뜻이 있는 이곳은 기원전 18세기경에 철과 전차의제국 힛타이트 왕국의 수도 핫투사스가 있었던 곳이다.이런 사실은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20세기초 보카즈쾨이 유적을 발굴 조사한 독일의 고고학자들은 한 장의 점토관을 앞에두고 흥분하기 시작하였다.그 점토판에는 이집트와 힛타이트간에 체결된 평화조약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그것은 이집트 왕의 무덤에서 발견한 평화조약과 완전히 일치했다.중동의 고대왕국 힛타이트왕국이 실재한 사실과 그 수도가 보카즈쾨이에 있었다는 사실.이집트와 평화조약을 체결한 사실이 단숨에 증명되었기 때문이다.이로부터 몇년 후 힛타이트인이 사용한 문자가 해독되어 힛타이트 왕국의 역사가 속속 밝혀졌다.이 당시 철을 생산하는 기술은 힛타이트 왕국만이 가지고 있었다.철제 무기는 청동기 무기에 비해 훨씬 튼튼하고 위력적인 좋은 무기였기 때문에 많은 나라에서 갖고 싶어했다.그러나 힛타이트 왕국은 철제 무기와 장식품을 수출하는 경우는 있어도 제철법과 제철 기술은 결코 나라 밖으로 전하지 않았다.그러기 때문에 철은 금의 5배.은의 40배나 되는 가치가 있었다.철은 인류 역사상 매우 중요한 금속이고 철은 이 시대에 가장 비싼 귀금속이었다.철을 만들어 내는 힛타이트 왕국이 소아시아를 지배하게 된 때는 기원전 18세기 경으로 전해진다.소아시아를 통일한 힛타이트는 게속 남쪽으로 진출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시리아와 팔레스타나 해안지대를 장악하기 위해서였다.이러한 힛타이트의 남하정책은 이집트와 충돌을 불러 일으꼈다. 힛타이트 무와탈리슈왕은 카메쉬에서 시리아 전역의 패권을 놓고 이집트 라메수2세와 격돌하게 되었다.이 전쟁은 철기 무기와 전차를 사용하는 힛타이트와 청동기를 사용하는 이집트가 붙은 싸움이었다.전쟁의 세력은 이집트가 훨씬 강했지만 철기 무기 앞에서는 무력하였다.결국 승리는힛타이트에게 돌아갔다.그러나 힛타이트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이후 팽팽한 대립을 이어져 가다가 이집트와 힛타이트는 태도를 바꾸어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동쪽에 앗시리아라는 강대국이 등장하면서 두나라로 하여금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계기가 되었다.조약에는 두나라는 서로 공격하지 않는다.제3자의 공격에 대해서는 공동으로 대응한다.등의 내용이 적혀있다.이것은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평화조약이다.이후 두나라는 70년 동안 이 조약을 철저하게 지켰다.철을 생산하는 기술이 오리엔트 일대에 퍼지고 더욱이 지중해를 건너 그리스인에게 전해진 때는 기원전 13세기 말 힛타이트 왕국이 새로은 철의 기술을 더 완벽하게 습득한 " 바다의 백성"이라고 불리운 민족의 공격을 받아 멸망한 이후 였다.힛타이트왕국이 멸망하면서 독점하던 제철법도 끝이나버렸다.이렇게 처음으로 철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나라는 멸망하여 폐허 속에 파묻혀 사람들의 기억속에 서 사라져버렸다가 그로부터 3천년이 지난 20세기 초에 드러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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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중동 힛타이트 문명

 

 

 

 

 

 

 

 

오늘날의 터기에 해당하는 소아시아 지역은  중동 문화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소아시아 반도는 나일강 유역처럼 단일 문명권은 아니었다.복잡한 해안선을 따라 이루어진 비옥한 지대인 에게해 연안.산맥으로 둘러 싸인 중앙 고원지대.울창한 삼림지대인 흑해 연안 등의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이 지역에서의 문명은 기원전 4000년전으로 추정되고 있다.그러나 통일된 정치 조직이 이루어진 것은 인도 유렵어족 계통의 힛타이트인이 등장한 후에 이르러 서였다.힛타이트인은 기원전 2000년경에 이르러 할리스강이 시작되는 중앙 고원지대의 일부를 점령하면서 소아시아 반도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이들은 정복 지역에서 당시의 여러 문명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특히 북부 시리아를 지배하던 후리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이 때에는 메소포타미아의 문화적 장점들이 소아시아의 인도유렵어족에게도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힛타이트인의 역사는정치.문화적 체제가 아직 혼란한 상태에 있고 중앙의 권력도 확립되지 못했던 고왕국 시대와 중동의 최강 세력으로 성장하던 제국 시대로 나누어 볼 수 있다.힛타이트인의 문화는 정복된 이웃 민족들로부터 받아들인 요소들에다가 원래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요소들을 결합시킨 것이였다.초기에는 힛타인들의 지배자는 귀족들의 우두머리를 일반회의에서 선출하였다.그 러나 이러한 체제로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지배를 시행할 수가 없었다.세력이 더 커진 후에야 수도를 핫투사스로 삼은 후 체제가 점차로 중앙집권적 체제로 정착되고 강력한 왕권의 강화와 국력을 바탕으로 정복사업을 시작했다.

 

 

 

 

 

16세기 말에는 바빌로니아를 함락시키도 했다.그러나 인접한 후리인의 마탄니 왕국과 잦은 충돌로 영토 확장이 제약을 받고 있었다.기원전 14세기 경에 이르러 힛타이트 슈필롤리우마슈대왕(기원전 1380-1336 재위)의 공격으로 마탄니 왕국은 정복되었다.이 여세를 몰아 남부 시리아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기원전 1286년에 무와탈리슈왕은 카메쉬에서 시리아 전역의 패권을 놓고 이집트 라메수2세와 격돌하게 되었다.이 전쟁은 철기 무기와 전차를 사용하는 힛타이트와 청동기를 사용하는 이집트가 붙은 싸움이었다.전쟁의 세력 은 이집트가 훨씬 강했지만 철기 무기 앞에서는 무력하였다.결국 승리는힛타이트에게 돌아갔고 이로부터 힛타이트 제국은 그 세력이 절정에 달했다.힛타이트인들은 수메르.악카드어를 사용하고. 기록을 위해서는 설형문자와 상형문자를 사용했다.역사적.종교적.신화적 사건을 문학적 형태로 편찬하여 점토판에 기록하였다.힛타이트인들의 종교는다양한 신의 개념들을 결합한 것이였다.풍요의신은 텔레피누신이였고 그가 지상에  있으면 자연물등이 생기를 얻고 번성하나 그가 지상에서 사라지는경우에는 자연물등이  시들해지는 황폐의 시기가 온다.이는 계절의 변화에 대한 신화의 설명이다.텔레피누신은 수메르의 도무지신.이집트의 오시리스와 유사하다.힛타이트의 샤르샤신은 수메르의 이슈탈신과 같은 것이였다.이외에도 힛타이트인은 후리인의 신화속에서 나오는 비숍과 그의 배우자인 태양의 여신해바트와 같은 신들을 자기들의 신으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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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왕 파라오 투탄카몬

 

 

 

 

 

 

고대이집트 신왕국 이그나톤왕이 왕의 신권을 회복하고자 종교개혁을 일으켜 수도를 옮겼으나 이크나톤 왕이  죽자 태양신 아몬 레 신의 사제들이 다시 세력을 잡고  나이 어린 투탄카몬을 파라오로 세워 수도를 다시 테베로 환도하였다.당시의 국제정세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이크나톤 왕은 국내 문제에만 신경을 쓰고 국외 제후국들에 대한 관리를 소홀히 했다.이 틈을 타서 기원전 17세기경 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힛타이트인들이 소아시아 지역을 장악하고 세력을 확장하면서 시리아 남부 지역의 이집트 영토를 유린하였다.이런 상황속에서 즉위한 10세의 어린 왕 투탄카몬은  아몬 레 신 사제들의 강압에 따라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늙은 사제 아이에가 시키는대로 꼭두각시 파라오 노릇을 하다가 불과 18세의 나이에 수명을 마친 비극의 소년왕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묘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전해내려오면서 애절함을 보이고 있다.고대 이집트 파라오의 무덤은 이미 중왕국시대부터 피라미드는 사라지고 암벽에 동굴을 깊이 파서 묘를 만들었다.피라미드 내부의 금은 보화를 노리는 도굴범들의 손길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암벽의 동굴안에 파라오의 미이라와 금은 보화를 넣고 입구를 눈에 띄지 않게 봉해버렸다.그러나 이런 형태의 왕묘도 도굴을 면치 못했다.현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 왕묘들이 도굴을 당해 금은 보화를 전부 도난당했다.그런데 오직 하나 거의 원형대로 남아 도굴을 면한 왕묘가 1922년에 영국의 카아나몬경과 카아터에 의해 발견되었다.그 안에는 막대한 양의 보화와 당시의 이집트 예술 수준을 보여주는 황금의 관.조각품 등이 경탄을 자아내게 했다. 이 왕묘는 소년왕 투탄카몬의 무덤이었던 것이다.무려 3 천년 여  세월동안 전혀 도굴을 당하지 않은 점에 모두가 의아해 하였다.

 

 

 

 

투탄카몬 왕의 무덤 입구에는 "왕을 방해하는 자에게는 죽음의 날개가 스치리라" 라는 경고가 새겨져 있었다.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왕묘 발굴이 있은지 5개월 뒤에 카아나몬 경이 모기에 쏘여 죽고 말았다.그는 비운의 소년왕 투탄카몬의 이름을 중얼거리면서 숨을 거두웠다.그가 죽은지 6개월이 지나 아우 하바아트 대령이 죽었고.뒤이어 카아나몬 경의 간호를 맡았던 간호원이 죽었다.그 후에는 카아나몬 경의 동료였던 카아터의 비서가 죽었고. 그 외에도 발굴과 관련된 사람들이 원인 모를 병이나 사고로 하나 둘 씩 죽어가 총 사망자수가 20여명에 이르렀다.이집트인은 이것을 가르켜 "파라오의 저주"라고 부르고 있다. 기원전 1090 년 경 고대 이집트 신왕국은 상하 이집트로 분리되면서 그 막을 내렸다.기원전 7세기경에 앗시리아의 대칩입이 시작되면서 이집트는 점차적으로 이민족의 지배를 받게 된다.앗시리아 왕 에사르하돈은 삼각주 지역을 정복하고 아들 비코로 하여금 지배하도록 하였다.그 후 비코의 아들 프사메티쿠스1세는 앗시리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이집트왕국을 재건하고 수도를 사이스에 정했다.이 왕조를 사이스 왕조라고 한다.아마시스 2세의 치세하에서 그 전성기를 맞게 된다.특히 그리스 식의 무역도시인 나우크라티스의 번영을 가져왔다.사이스왕조 시대에 이집트에서는 타민족의 지배에 대항하여 이집트 민족중시의 경향과 고왕국 시대의 영광을 그리는 의식이 두드러졌으나 한편으로는 그리스와 리디아까지도 포함하는 세계 무역을 추구하였다.그 후 이집트는 기원전 526년에 페르시아 왕 캄비세스 2세의 지배에 들어감에 따라 독립을 상실하고 속국으로 전략하였다.결국 파라오의 제국 이집트는 사라졌지만 수 천년에 걸친 유구한 문화는 사라질 수 없었다.이집트 문화는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이룩된 헬레니즘 시대를 거치면서 그리스 문화와 융합되어 세계 문명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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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이집트 신왕국시대(기원전 1580년-1090년)

 

 

 

 

 

 

 

이집트 중왕국시대는 제 2 중간기 혼란시대인 기원전 1680년에서 1580년 경 힉소스의 지배를 받았다.이러한 힉소스인들은 이집트 신왕국시대 아흐메스1세에 의해 이집트로부터 팔레스타인으로 쫓겨났다.이 때부터 이집트인들은 그 이전의 어느때 보다도 이집트 민족을 위한 정책을 펼쳤으며 대외적 영토도 크게 확대되었다.이 때의 신왕국은 크게 부강하거나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 영토는 이전의 어느 시기보다 더 넓혔던 것이다.이집트의 팽창정책은 투트메스1세와 그 후계자들에 의해 계속되어졌다.파라오의 권위는유프라테스강 유역까지 펼치게 되었다.이렇게 정복사업에 치우치다 보니 제국 내 질서는 흐트러지자 하트셉수트라는 여왕이 등장하면서 팽창사업을 억제하고 내정에 치중하면서 건축사업과 예술행사에 눈을 돌렸다.여왕이 죽자 어렸을 때 왕위를 빼앗긴 투트메스3세가 (기원전 1480-1448년)재위에 오르며 여왕에 대한 모든 기념물을 파괴하고 다시 팽창사업을 시작하였다.왕의 정복사업은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그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 매깃도에 버티고 있던 힉소스인들의 잔존 세력을 완전히 소탕해버렸다.이 승리로 힛타이트.앗시리아.크레타 등의 국가들로부터 조공과 사절을 받고 그들은 스스로 제국의 권위에 복종할 뜻을 밝혔다.이 후에도 유프라테스강 상류를 넘어서기도 했다.그는 총 17차 원정을 통해 당시 오리엔트 최강국이 되었다.남쪽으로는 누비아.북쪽으로는 유프라테스강.서쪽으로는 리비아.북동쪽으로는 팔레스타인과 시리아까지 미쳤으며 투트메스3세는 명실공히 세계 각국의 지배자로 등장하였다.아멘해텝 3세(기원전 1413-1377 년)에 이르러서는 이집트 사상 최대의 영토를 이루었다.그러나 뒤를 이는 아멘해텝 4세에 이르러서는 서서히 국력이 기울기 시작하였다.

 

 

 

 



 

 

 

이집트 중왕국시대의 신은 아몬 레였다.당시의 파라오들은 자신의 지배권에 신성권을 부여해준 사제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따라서 절대적 권위는 많이 상실돠었다.신왕국시대에 들어서도 사제들의 세력이 파라오의 세력을 능가할 지경에 이르렀다.그러자 아멘해텝 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사제들의 세력을 누루기 위해서 신의 권위를 능가하는 새로운 신을 내세우게 되었다. 아멘해텝 4세는 태양의 회전에 착안하여 새로운 태양신의 이름을 아톤이라 이름 짓고 아톤 신만이 우주의 유일한 신이라고 선포하였다.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아톤의 광휘" 라는 뜻의 이크나톤으로 바꾸고 수도도 아몬 레 신 숭배의 테베에서 나일강 북쪽에 새로 건설하고 "아톤의 지평선" 이라는 뜻의 아게타톤이라고  명하였다.이그나톤왕은 이러한 종교개혁을 통해 왕의 권위를 되찾는데 성공을 거두었다.사제의수를 줄이고 그들의 임무를 제한하였다.왕 자신이 사제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이 시대에 수도 아케타톤을 중심으로 눈부신 지적활동이 이루어지고 오랫동안 침체돠어 있던 예술도 이전의 형식주의를 버리고 신선한 자연주의 경향을띄게 되었다.그러나  이그나톤왕이 죽자 아몬 레 신의 사제들이 다시 세력을 잡고  나이 어린 투탄카몬을 파라오로 세워 수도를 다시 테베로 환도하였다.당시의 국제정세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이크나톤 왕은 국내 문제에만 신경을 쓰고 국외 제후국들에 대한 관리를 소홀히 했다.이 틈을 타서 기원전 17세기경 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힛타인들이 소아시아 지역을 장악하고 세력을 확장하면서 시리아 남부 지역의 이집트 영토를 유린하였다.이런 상황속에서 즉위한 10세의 어린 왕 투탄카몬은 아몬 레 신 사제들의 강압에 따라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늙은 사제 아이에가 시키는대로 꼭두각시 파라오 노릇을 하다가 불과 18세의 나이에 수명을 마치고 말았다.사제 아이이가 직접 파라오에 즉위하였다.그러나 그역시 얼마가지 못해 죽고 당시에 명망이 있던 하렘헤브 장군이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은 파라오에 즉위하였다.이후 세티 1세.라메수2세등이 영토회복에 노력하면서 부흥을 이루어 카르낙 대신전 건축 등 대규모 사업도 행해졌다 그러나 힛타이트인들의 빈번한 칩입으로 국력이 쇠퇴하면서 기원전 1090 년경에 상.하 이집트로 분리되면서 이집트 고대 신왕국은 그 막을 내렸다.상이집트 왕국은 테베의 사제들이 파라오가 되어 지배하게 되고 하이집트 왕국은 삼각주 지역의 파라오에 의하여 지배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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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이집트 중왕국 시대(BC2100-BC1680 년 경)

 

 

 

 

 

고대이집트 중왕국은 BC 2100 년 경에 세워져 아메네메스왕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 했다.생활의 중심지는 새로운 수도 테베로 옮아갔고 아몬(AMON)이 태양신 레와 동일시 되면서 Amon-Re 라는 새로운 신으로 등장하게 되었다.중왕국 시대의 파라오들도 신성을 주장했으나 고왕국 시대처럼 절대적 권력을 갖지는 못했다.지방의 귀족들은 자치를 누렸으며 각 주에서 거둔 세금도 파라오와 분할하는 특권을 누렸다.이 때부터 귀족들도 신의 세계 와 연관성을 내세우면서 내세에서는 오시리스와 결합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왕과 귀족들이 대립하면서 귀족들이 왕의 고문으로 임명되는 수가 극히 소수로 줄어들었다.파라오는 귀족들 보다는 충성심을 믿을 수 있는 서기 출신의 관리들을 택했고 이들은 관료적 중간계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이 때의 귀족들은 죽어서 왕의 무덤옆에 묻히기 보다는 자신의 영지에서 파라오 못지 않게 성대한 장례식을 치루고 묻혔다.중왕국 시대의 파라오는 절대적 권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이 때부터는 피라미드를 건설하지 못했다.중왕국 시대에 와서는 상업 활동이 활발하여 무역 및 교류가 중동 지방으로까지 확대되었다.페니키아 해안의 비볼로스항은 이집트 산물이 거래되는 거대한 상업 중심지였다.이집트 공예품들은 크레타섬이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수출되었다.이집트는 다신교 사회였다.신들의 수는 무수히 많았다.이집트인들은 여러 신화가 모여 전체적으로 우주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믿었다.물론 이집트의 가장 큰 신은 아몬 -레 였다.그는 태양신으로 창조 신 아튬의 권위를 이어받았다.아몬-레 밑에는 공기의 신 슈와 습기의 신 테프누투가 있다.이들은 모두 아튬의 자식들이다.이들이 서로 결합하여 대지의 신 게브와 하늘의 신 누트를 낳았다.누트와 게브가 결합하여 오시리스.세트.에프티스.이시스를 낳았다.이어서 오시리스와 이시스와 결혼하고 세트는 에프티스와 결혼한다.오시리스는 호루스를 낳고 세트는 아누비스를 낳는다.이에서 이집트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신화 "오시리스"가 탄생한다.오시리스 신화에서 처럼 파라오는 불행하게 죽을 수도 있다.그러나 영원히 죽는 것이 아니라  저승에서 다시 부활하여 오시리스와 같은 저승의 왕이 되는 것이였다.이 처럼 왕은 죽은 뒤  부활하기 때문에 장례식에서 생활에 필요한 모든 도구들이 미이라로 만들어진 시체와 함께 거대한 피라미드 무덤 속에 넣어졌다.그런데 고왕국 시대에는 파라오만이 죽어서 오시리스와 결합한다고 생각되었지만 중왕국 시대에 이르러서는 귀족들도 이러한 과정을 밟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신의 의지에 따라 종교적인 계율을 열심히 지키다가 일생을 마친 일반 사람들도 역시 내세에서 부활하여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고대 이집트의 예술품에는 주로 파라오와 왕비의 조각품이 있다.파라오는 영원한 신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를 표현할 때는 영원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얼굴은 옆모습 일지라도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한다든지 가슴은 앞모습을 표현하면서 다리와 눈은 옆모습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신비한 모습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이러한 파라오의 표정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고왕국 시대에는 파라오의 조각상에서 세속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는 듯 표현되고 있지만 중왕국 시대에 와서는 고통과 근심이 가득찬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이집트에서 명상적인 문학이 등장한 것은 고왕국 말기 시대부터 였다.이 시대에는 전례없는 혼란기가 세상을 뒤덮고 있었기 때문에 이집트인들은 어째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돠었는가를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다.중왕국 시대에 이르러서는 저승 세계에서 부활할 수 있는 계층이 확대됨에 따라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다루는 윤리적인 문학이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사후의 신비적인 문학도 발전하게 되었다."사자의 서"는 대표적인 예이다.교역을 통한 이집트 중왕국의 번영은 세누세르트 3세 때 절정을 이루었으나 기원전 1800년 경 무렵에 국운이 쇠퇴하면서 고왕국 말기에 제1중간기 혼란시기에 이어 제 2 중간기 혼란시대로 접어들면서 기원전 1680년경에는 힉소스의 칩입을 받고 기원전 1580년 경까지 힉소스의 지배를 받으면서 고왕국 시대 제 1중간기 혼란시대보다 더 큰 상처를 남겼다.그 동안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은 언제나 외부의 칩입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다고 생각하던 이잡트인들에게 쓰라린 교훈을 안겨주었다.반면에 힉소스인들로부터 발전된 군사기술을 전수 받고 이때부터 바퀴가 달리고 말이끄는 전차제조법이나 제련법을  배웠다.이 때 습득했던 군사기술을 이용하여 후에 이집트 신왕국 시대에 가서는 정복 사업에 까지 나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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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고왕국과 피라미드의 함정  

 

 

 

 

 

현재 이집트에는 약 80여개의 피라미드가 남아 있다.이 숫자는 고대 이집트 왕국 3천 년 역사속에서 피라미드가 한창 만들어진 고왕국  500년 기간에 만들어진 것이다.세계에서 가장 큰 피라미드를 만든 쿠푸왕이 죽고 나서 부터 왕들은 피라미드 건설을 단념하고 옛날의 모습인 사각형 돌로 만든 무덤에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이집트 왕들은 왜 피라미드 건설을 단념했을까? 바로 문지기.세탁하는 사람.빵 만드는 직인.과자 만드는 직인.심부름 꾼 등 시민들이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혁명의 중심지는 멤피스였으며 혁명위원회가 조직되었다.원인은 첫 번째로 고관대작과 주지사의 권력이 너무 강력해졌기 때문이다.피라미드는 왕의 조직적인 통제력으로 만들어졌다.이러한 왕의 조직을 움직이고 있던 고관대작들이나 주지사는 그 지위를 후손에게 물려주고 대대로 소유 토지도 늘어남에 따라 그들이 민중을 지배하게 되었다.고관대작들과 주지사는 자신들의 토지를 운영하기 위하여 경작농민 외에도목동.어부.목수.정원사.가구공.염직공.금은 세공인.도공.석공 등 일반 시민들도 부리게 되었다.두 번째는 왕이 즉위할 때마다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때문에 나라의 부가 탕진되어 버렸다.세 번째는 세금의 수입이 줄어들게 되었다.따라서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농민과 경지를 지정하여 거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대체하게 되었다.따라서 지정받은 농민과 경지는 세금을 면제하였다.피라미드의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 수록 왕국의 재정은 감소하였다.네 번째는 대외무역의 적자이다.구리가 묻혀있는 시나이반도로 가는 길은 사막에 사는 유목민들이 위협하여 구리의 유입도 원할하지 못했다.역대로 건설한 피라미드의 함정에 빠져버린 것이다.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고관대작의 독재정치가 펼쳐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에 반발한 세력들이 왕을 축출하고 피라미드에 숨겨진 재산을 파헤치고 이집트의 평화를 지키는 왕의 권위를 거역하였다.도시는 순식간에 쓸모없는 산으로 변해 버렸다.혼란속에 서 귀족들은 단결하였다.그들은 누비아 용병을 이용해 혁명위원회를 전복시켰다.이후 국왕이 다시 귀족에게 대항하여 민중의 지지를 받고 왕국을 다시 바로 잡았다.그러나 왕의 권위는 이전의 신이라기 보다는 인간임이 강조되었다.이러한 고왕국 말기부터는 급격하게 왕권이 쇠퇴하면서 피라미드의 건설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사라지기 시작했다.고왕국은 기원전  2200년 경에서 2100년 경까지 극심한 혼란기를 틈타 군웅할거시대를 맞이하여 서서히 몰락하면서 기원전 2100년 경 이집트 중왕국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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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신화 "오시리스"

 

 

 

 

 

 

이집트 카이로 교외에 석양이 질 때 삼각형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채 검게 비치는 세개의 피라미드의 모습은 한마디로 장관이다.이 피라미드들은 약 4500년 전에 이집트에 군림한 세 왕의 무덤이다.옛날 주변에 있던 궁전이나 신관의 저택.요새 등 벽돌과 나무로 만들어진 건물은 거의 없어졌지만 돌로 쌓은 왕의 무덤은 오는날까지 남아 있다.기제의 북동쪽에 있는 이집트의 최대 피리미드는 높이가 137미터.가로.세로가 각각 230미터. 평균2.5톤의 돌이 230만개나 쌓아올려져 있으며 그 가운데는 16톤의 돌도 사용되었다고 한다.2.5톤의 돌이라면 요즘 트럭1대에 1개만을 실을 수 있는 큰 돌이다.이집트인들은 이 같이 큰 돌을 어떻게 깎았을까? 당시에는 청동기와 철기가 발명되지 않았던 시대였다.따라서 돌로 만든 망차와 부드러운 구리로 만든 정과 톱이 사용되었다.능수능란한 석공들은 돌의 눈을 유심히 주목한다.나무에도 눈이 있듯이 암석에도 암석을 자르는데  제일 먼저 제거해야 할 " 돌 눈"이 있다.석공들은 돌망치로 눈의 방향에 구멍을 깊게 판다.구멍이 패이면 이곳에 단단한 나무로 만든 쐐기를 박는다.그리고 위에서 물을 가만히 부으면 잠시 후에 나무가 팽창하는 힘에 의해서 돌 눈이 쪼개져 나온다.석공들은 이같이 소박한 방법으로 몇 톤이나 되는 거대한 돌을 잘랐다.피라미드 밑에 깔린 돌은 기제 부근에서 구했다.그러나 곁에 있는 아름다운 석회암은 나일강 강가에서 구해 배로 실어왔다.돌을 아름답게 깎고 다듬는 데는 청동보다 부드러운 구리톱이 사용되었다.자르는 부분에 수정가루와 특수모래를 바르고 물을 뿌리면서 자른다.이렇게 가공된 돌을 사막 위에 바로 쌓아 올리면 무너져 버릴 것이다.그래서 사막보다 높은 암석지대를 평평하게 고른 후 피라피드를 그 위에 쌓는 것이였다.

 

 

 

 

암석지대를 평평하게 깎기 위해 석공들은 피라미드를 4각으로 에워싼  입 구 口 자 모양의 수로를 어망의 눈처럼 가로.세로로 파 이 곳에 물을 붓는다.수면을 기준으로 암석을 평평하게 깎는 것이였다.현대의 기술로 이 수평면을 측량해보면  각 모퉁이의 오차는 20센티미터.방위의 오차도 단지 2도에서 3도에 불과하다.고대의 기하학이 놀라울 정도로 발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이렇게 정확히 다듬어진 암석지대 위에 돌 230만 개를 어떻게 쌓아 올렸는가이다.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자렛대 원리에 기초한 특수한 목제기구를 사용 해  한 단씩 한 단씩 쌓아갔다고 생각했다.1년에 3개월 동안 10만 명이 동원되어 돌을 잘라내고 운반하고 길을 닦는 데도 10년.왕의 유해를 묻는 현실을 만드는데도 10년 .그리고 피라미드를  쌓아올리는데 20년. 총 40년이 걸렸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동원된 인원은 많은 노예들이라고 주장하였다.그러나 현대 미국의 고고학자들은  헤로도투스가 추정한 사실은 이집트 안내인의 과장된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 주장한 것이라고 반박하면서 피라미드 건설에 동원된 노동자수는 4천명 정도이고 그들의 신분은 노예가 아니라 공공사업에 징발된 자유인이었다고 추정했다.노동은 매우 고됐지만 왕을 위한 노동에 줄거움을 찾은 시민들도 많았다.이집트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문서 가운데서 "기분좋게 집으로 돌아가 마치 신을 위한 근사한 제사 때처럼 빵을 배부르도록 먹고 맥주를 마셨다" 는  기록이 있다.시민들은 20명이 한 조를 이뤄 수 톤이나 되는 돌을 통나무 두 개를 나란히 깔고 삼나무 열매기름을 부어가며 수례에 실어 끌면 그다지 힘을 들이지 않고도 쉽게 무거운 돌을 운반할 수 있었다.이 방법은 지금도 정원사가 정원석을 옮길 때 쓰이고 있다.

 

 

 

 

 

 

 

 

 

이집트에서 미이라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피라미드가 건설된때 이지만 완벽한 미이라 제조법은 기원전 1500년 경으로 알려지고 있고 그때는 이미 피리미드의 건설은 중단된 상태였다.이집트에서 거지들의 유해는 변변치 못한 삼베를 몸에 둘러싸아 공동묘지에 묻었다.이렇게 묻힌 거지의 유해는 건조한 날씨 덕분에 자연적으로 미이라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죽더라도 인간의 육신은 썩지 않고 남는다는 이집트인의 사고방식은 내세를 믿는 강한 신앙이 되었다.지상에서의 생명은 일시적인 것이며 육신의 죽음으로부터 제2의 영생이 시작된다고 생각했다.왕은 물론이고 노예까지도 자신의 사후 생활에 대해서 생각했다.이집트인이 죽은 사람의 유해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가는 신화 속에도 잘 나타나 있다.바로 이집트인이 좋아하는 "오시리스 신화" 이다."땅의 신 게브와 하늘의 여신 누투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오시리스 는 자비로운 왕으로서 지상의 모든 인류를 지배해 그들을  미개상태에서 문명으로 인도하고 있었다.그러나 오시리스 동생 세트는 이를 질시해서 계락을 꾸며 오시리스를 상자에 집어넣고 나일강에 떠내려 보냈다.오시리스의 헌신적인 아내 이시스는 고생 끝에 지아비의 유해를 찾아내서 이집트로 돌아와 관을 지키면서 아들 호루스를 낳았다.세트는 또다시 오시리스의 관을 찾아내 산산조각내고 이집트 각지에 뿌렸다.그러나 이시스는 다시 정성들여 모아 본래의 모습으로 만들었다.태양신 라는 사자(死者)의 신 아누비스에 명하여 오시리스 유해를 미이라로 만들게 하였다.이시스는 자신의 날개로 오시리스 미이라에 바람을 불어넣어 소생시켰다.소생한 오시리스는 죽은 사람들의 왕이 되었다.성장한 아들 호루스는 세트에게 복수할 것을 맹세하고 역경을 극복한 끝에 오시리스 의 왕위를 이었다.헬리로폴리스 의 산이 주재한 재판은 호루스의 정통성을 인정했다."   이 신화는 왕이 사후에 부활하여 신이 주재하는 세계의 왕이 되어 영원한 일생을 보낸다는 이집트인의 내세관을 보여준다.불사신으로 간주되는 사람은 처음에는 왕과 그 가족뿐이었다.피라마드는 바로 그 왕들의 무덤 으로서 사후의 주거지로 만들었던 것이다.이집트에서 피라미드가 만들어지기 전의 무덤은 마스타바였다.마스타바와 주거지는 모두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제조법을 배워 마른 벽돌로 만들었다.이집트 고왕국 제 3왕조의 왕 제세르가 계단식 피라미드를 처음으로 만들었을 때부터 신의 영원한 주거지는 돌을 쓰게 되었다.이후로도 왕궁의 주거지는  마른 벽돌을 사용했지만 피라미드와 신의 영원한 주거지 신전은 돌로 만들게 되었다.현재 이집트에는 약 80개의 피라미드가 남아 있다.이집트 3000년 역사속에서 피라미드가 한창 만들어진 것은 500년간 고왕국시대에 불과하다.그이후의 시대에서는 파라미드를 만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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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집트 제세르 왕과 피라미드

 

 

 

 

 

 

 

 

카이로시는 나일강(江) 삼각주의 남단에서 약 25km 남쪽 나일강 우안에 있다.시가는 하중도(河中島)인 게지라섬에서 강의 좌안까지 펼쳐지며 아랍권과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카이로는 이집트의 수도로서 20세기에 갑자기 팽창하였다.세계의 대도시 가운데서도 비가 오지 않는 도시로 유명하다.카이로의 강수량은 약 28밀리미터이다.그러나 기온은 겨울에도 평균 12도로 따뜻하기 때문에 유렵에서 휴가를 보내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도 많다.비가 거의 오지 않는 카이로에서 많은 사람이 먹고 마시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두 나일강 덕분이다.나일강은 해마다 6월부터 9월까지 물이 불어나 범람하며 10월부터 2월까지는 물이 모자라는 건조기로 접어든다.고대 나일강 유역에 농업과 목축업이 전파된 시기는 기원전 4,500년 경이다.나일강의 범람이 끝나 물이 줄어들면서 잠겨 있던  땅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움푹 패인 주변과 흘러내려가는 물줄기를 막은  둑 주변에 보리와 밀을 심는다.그리고 건조기가 되면 익은 곡식을 거두어들인다.제방을 쌍아올려 저수지를 크게 만들고 운하를 건설하면서 식량 생산과 인구도 늘어났다.저수지와 운하건설로 경지면적이 점점 넓어져갔기 때문이다.여러 곳에 우물을 파서 용수로  사용하였다.우물의 높이는 나일강의 높이와 똑같았기 때문에 나일강의 홍수를 예측하는 측량계의 역할을 했다.왕의 등장은 사람을 동원해서 저수지와 운하건설을 진행하는 지도자가 필요하면서부터이다.이집트 최초의 왕은 기원전 3,100 년 경 전갈왕이었다.이집트의 문명이 태동하던 시기이다.사람들은 나일강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지도자로서의 왕이 필요했다.이집트 전역은 왕의 토지였고 이집트 농민은 왕의 백성이었다."나일강의 선물"이라고 일컬어지는 기름진 토지도 저수지와 관개용수가 없으면 많은 수확량을 기대할 수 없었다.해마다 사막의 모래에 묻힌 저수지와 운하를 수리하여 새 운하로 만드는 일은 왕의 책무였다.이집트는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생활에 필요한 금.은.동.나무.보석 등은 외국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었다.무역로의 안전을 위해 대상과 상선대는 군대의 보호를 받았다.시나이반도에 매장된 구리광산을 독점할 수 있었던 것도 왕의 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왕은 각 주에 주지사를 파견하여 수확량.가축 수를 조사하여 이것을 기초로 세금을 징수하고 관개운하의 건설과 피라미드 및 신전 건설을 추진하였다.

 

 

 

 

 

 

 

 

 

 

피라미드 건설은 이집트 왕이 온 힘을 기울인 대사업이었다.이집트에서 처음으로 피라미드를 만든 왕은 기원전 2,680년 경 "제세르"왕이었다.최초로 4각으로 된 돌무덤 마스타바를 네 겹으로 쌓아올렸으며 다시 여섯 겹까지 쌓아올려 높이가 62미터나 되는 계단식 피라미드를 만들었다.피라미드 안에 왕의 유해를 묻은 현실에는 안락한 생활을 보여주는 벽화가 새겨져 있으며 사후에도 퐁요로운 생활를 위해 그곳에 왕의 재산을 옮겨다 놓았다.그리고 "하늘에 오르는 계단이 왕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기원전 2,613년에 즉위한 스네프루왕은 남쪽에 있는 누비아 지방을 공격해 포로7천명.소 20만마리를 빼앗고 이어서 서쪽에 리비아를 공격헤 포로 1천100명.소 1만 3천 마리를 빼앗았다.이 스네프루왕이 피라미드 건설에  건 집념은 대단했다.처음에 정사각뿔 모양의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나 도중에 쌓아올린 돌이 무너져 실패하자 완성되지 않은 피라미드를 그대로 놓아두었다.이것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2단식 피라미드이다.왕은 정사각뿔  모양의 피리미드를 다시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아래쪽에 있는 돌이 흔들렸기 때문에 포기하고 이후로 설계를 변경한 것이 세번째 도전해서 만든 굴절 피라미드이다.가로.세로가 각기 213미터.높이가 99미터인 정사각형뿔의 피라미드를 완성했다.현실에는 "하늘은 그대를 위해 햇빛을 강하게 비추었다.그대가 태양신 라의 눈을 통해 하늘에 오를 수 있도록"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스네프루왕은 계단을 이용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햇빛을 타고 하늘에 오르려고 생각했다.완성된 피리미드 옆에는 거대한 태양배가 시신과 함께 묻혀 있다.하늘에 올라 태양신의 눈이 된 왕은 매일 태양배를 타고 하늘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항해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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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강이집트 문명의 태동

 

 

 

 

 

 

 

이집트 지역에 인간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약 20 만전으로 올라가지만 문명이 발생하기 시작된 시기는 기원전 3,000 년경으로  노모스라는 도시 국가들이 형성되었는데 이집트인은 셈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햄족계통의 민족이다.이러한 도시국가들을 메비스라는 전설적인 왕이 나타나 통일 왕국을 이루었다고 한다.이집트의 지리적 조건은 메소포타미아 와는 달리 사막과 바다로  둘려싸여 외부의 칩입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따라서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도 거의 2,500 년 동안 별다른 변화없이 고유문화를 간직할 수 있었다.고대 이집트는 기원전 6세기 경 후반 폐르시아왕국에 정복 될 때까지 약 2,500년 동안 고왕국.중왕국.신왕국을 거치면서 이집트 통일국가체제를 지켜왔다.이집트의 통치자는 파라오라 불리우는 전제 군주였다.그는 신의아들 또는 신의 현신으로서 절대권력을 쥐고 있었다.파라오 밑에는 신관과 관료가 있어 그들의 세력도 강대하였다.주민의 대부분은 부자유 농민으로서 공납과 부역의무를 지고 있었다.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란 말이 있듯이 강 유역은 정기적으로 범람하여  땅이 기름져 농사를 짓기위해 좋은 천혜의 땅이였다.따라서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와 마찬가지로 일찌기 농경문화가 시작되었고 관개 농업이 발달하였다.나일강은 티그리스강이나 유프라테스강 보다는 훨씬 더 유용했다.비록 매년 홍수로 인해 강이 범람하여 제방위에 있던 모든 것을 진흙속에  묻어버리기는 했어도 그 범람은 정기적으로 예견할 수 있었다.메소포타미아 초승달 지역과는 달리 규칙적으로 범람이 있었기에 농사의 시기를 조절할 수 있었던 것이다.이집트인에게는 나일강이라는 풍요로운 삶을 신의 선물로 주어졌다.이 시대를 이집트의 고왕국시대라고 불리운다.고왕국 시대에는 고대 이집트 문명의 기반을 세웠다.대표적인 것이 대규모 건축양식으로서 피라밋을 들 수 있다.최초의 피라밋들은 왕을 위한 거대한 무덤들이었다.그 규모도 놀라웠지만 당시에 초보적인 도구들만의 사용으로 만들어 졌다는 점은 무척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기제에 있던 피라밋들은 가장 큰 것이 높이가 170 미터에 달했고 소요된 돌은 6백만 톤에 달했다.각 변의 길이가 250미터에 달했는데 그 오차가 불과 20센티 미터 미만에 불과 해 당시의 기하학 및 건축 수준이 수준급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왕들은 그저 지상에서 신의 대리인에 불과했다.그러나 이집트에서는 왕은 이집트의 중심이었고 신과 같은 존재였다.이집트는 우주의 중심이었다.이집트인들도 모든 자연현상을 신화를 통해 설명하였다.파라오라고 불리는 왕은 태양신 레의 아들이었다.파라오는 죽으면 나일강의 신인 오시리스와 결합되어 한 몸이 된다.그리하여 저승에서 신으로  부활하여 나일강의 범람을 조절하며 그리하여 곡식은 결실을 맺게 되는것이라고 믿었다.따라서 파라오는 살아있는 신이였기에 모든 국토는 그의 재산이었다.이 처럼 왕이 신성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은 파라오만이 거대한 관개사업을 추진하여 나일강을 조절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주는 능력자라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따라서 이집트 고왕국시대의 왕들은 사제들 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지게 되었고 신적인 존재로 숭배받게 되었다.피라밋 외에도 많은 건축물이 세워졌다 .부자들도 스스로 자기와 가족들의 무덤을 건설했으며 이집트인의 일상 생활을 알려주는회화물로 무덤을 예쁘 게 장식하였다.피라밋 다음으로 많이 알려진 고대 이집트의 상징은 미이라였다.고대 이집트인들은 죽은 후에도 영혼이 살아남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 미이라를 만들었다.죽은자의 내장을 제거하고 특별한 방부제를 넣어 붕대로 싸여졌다.미이라 중에는 얼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수천년전 인간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이러한 것들은 방부제 처리 기술성의 우수한 점도 있지만 건조한 사막의 기후가 부패를 막아주었던 기능도 있었다.당시의 시체와 함께 침대.주전자.보석.장난감 등과 같은 일상 생활 도구와 심지어는 식량도 함께 넣어 부장했다.당시의 고대 이집트에는 히에로글리프라는 상형문자가 사용되고 있어서 대략적인 고대 이집트의 역사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기념비나 묘비 등의 공식적인 기록에 주로 사용되고 일상 생활에서는 상형문자를 개량한 히에라탁이라는 신성문자가 사용되었다.이 문자는 메소포타미아의 설형 문자보다 한결 유연했다.이집트에서는 메소포타미아 와는 달리 표면의질이 종이와 거의 비슷한 파피루스라는 갈대가 풍부하여 글씨 쓰기가 훨씬 부드러웠다.인간이 만든 모든 제도가 다 그러하듯이 고대 이집트의 중앙 집권적 권략구조도 절대 불변의 것은 아니었다.고왕국 제 6왕조 마지막 왕 페피2세를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기원전 2,200년 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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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로니아 함무라비대왕과 최초의 성문법전

 

 

 

 

 

 

 

20세기초에 프랑스 유적발굴대는 페르시아 수도였던 수사에서 지름이 61센티.높이가 2.2미터인 검은 돌로 만들어진 둥근 기둥을 발견하게 된다.그 둥근 기둥에는 설형문자로 된 조문 282 가지가 새겨져 있고 위쪽에는 태양신 사미시로부터 법전을 받는 함무라비왕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이것이 당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법전 함무라비 법전이다.바빌론이 화려한 강대국으로 떠오른 것은 고바빌로니아의 제6대 왕인 함무라비왕 시절부터였다. 함무라비는 탁월한 외치와 내정 능력으로 작은 마을이었던 바빌론을 거대한 도시로 확장했다.함무라비는 활발한 정복 사업을 통해 혼란스러웠던 메소포타미아 남부를 재통일했고 이때 이후로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방은 바빌로니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함무라비왕의 40년이 넘는 재위 기간 동안 바빌론은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발전했다.바빌로니아인이 인류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은 함무라비 법전이다.함무라비 법전은 높이 8피트의 딱딱한 돌기둥에 새겨져 공포되었다.이 법전은 거의 4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이 보다 앞서 수메르인.아카드인들도 성문 법률을 갖고 있었는데 함무라비왕은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하여 세계 최초의 성문 법전을 편찬하였던 것이다.법전의 머리글에 함무라비왕은 법전 공포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정의를 온 나라에 빛나게 하기 위해.나쁜자를 멸망하기 위해.강자가 약자를 학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과부와 고아가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도록하기 위해.평민이 가렴주구하는 악덕 관리로부터 피해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를  실천하기 위한 왕의 첫 번째 의무는 법과 의무를 온 나라 구석구석까지 고루 미치게 하는 것이 였다.두번째 의무는 도시와 그 주변의 토지를 적의 공격으로부터 지키고 영토를 유지.확대하는 것이였다.왕은 이를 위해 관리와 병사에게 왕실의 토지를 주었으며 그 대가로 왕 자신에게 봉사하도록 만들었다.전투.외교.군사의 소집 등은 모두 왕의 중요한 의무였다.

 

 

 

 

 

 

 

세번째는 신전을 건설.수리하고 농지를 에워싸고 흐르는 관개용 운하를 확대하는 일이였다.함무라비왕은 이와같은 왕의 의무를 충분히 완수했다.바빌론을 근거로 기원전 1724년부터 1682년까지 재위 기간 43년 동안 여러 도시를 정복해 고대 바빌론 왕국을 강성한 국가로 만들었다.함무라비법전의 특색가운데 첫번째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것과 같이 대등한 복수를 공인하고 있는 것이 있다.이를 복수법이라고 한다.그러나 함무라비법전의 복수법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인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귀족이 평민의 눈을 못쓰게 만드는 경우에는 은 1마나를 지불하면 된다." ." 만약 어떤 사람이 노예의 눈을 못쓰게 만드는 경우에는 그 반액을 지불하면 된다."이렇게 똑같은 범좌라 하더라도 신분에 따라 달랐다.당시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정복하고 바빌로니아 왕국을 건설한 종족은 셈족 계통의 아모리인이었다.그들은 원래 황야에서 유목생활을 하였다.거치른 유목생활에서 엄격한 규율을 통제하기 위해서 동족사이에서 적용하던 복수법을 피정복자인 사람들 사이에서 신분차별이 발생함에 따라 동등하게 적용할 수는 없었다.따라서 함무라비법전은 귀족.평민.노예라는 신분차별을 규정하고 있는 법이었다.바빌로니아 경제를 지탱하는 것은 귀족과 평민에 의한 농업과 상업이었다.도지 주변의 토지에는 염분이 많아 적당한 보리가 재배되었다.보리로 빵을 만들고.대추야자.양털로짠 옷감.건축자재 등의 물물교환이 성행했다.상인들은 대상을 이끌고 서쪽으로는 시리아사막을 거쳐 지중해연안으로 갔고.동쪽으로는 재그로스산맥을 넘어 이란 방면.배를 타고 페르시아만을 경유하여 인도에 가기도하고.아라비아해를 횡단해 동아프리카 이디오피아.소말리아와도 무역을 했다.이렇게 상인등의 활약으로 문화교류도 활발해져 메소포타미아인의 시야는 넓어져갔다.정의를 온 나라에 빛나게 한 함무라비왕은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에 걸친 대제국을 이루어 놓았다.성벽으로 둘러싸인 수도 바빌론은 오리엔트 중심도시로 번창했다.그러나 함무라비왕이 죽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국운이 쇠약해졌다.기원전 1550년경 힛타이트인의 칩입으로 멸망하면서 고바빌로니아왕조는 바빌론 제1왕조 시대를 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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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 새로운 주류 바빌로니아 

 

 

 

 

 

 

 

아카드인은 아카드 지방의 북부에 선사 시대부터 거주하였으며 BC 3000년경 최초의 키시(Kish) 왕조를 세우면서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처음으로 등장한다.아카드(Akkad)는 고대 오리엔트에서 활약한 민족 또는 그들이 살던 지방의 이름이다.이들은 수메르 북부지방에 이주 정착하여 살던 셈족 계통의 한 민족으로 사르곤(Sargon) 왕은 BC 2300 년경 부터 위대한 정복자로 알려져 왔다.사르곤 왕은 수메르의 루갈작게시왕을 패배시키고 메소포타미아 전역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그리하여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하나의 통일 제국을 건설하였다.그러나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속에서도 도시국가의 기본적 형태는 유지되었다.아카드 제국의 전성기는 사르곤왕의 손자 나랍신왕 때였다.그의 시대에 아카드 제국의 영토는 최대의 판도를 자랑하였다.그러나 수메르인들의 저항은 끈질기고 강했다.아카드 제국은 나날이 쇠약해져 가던 중 북동 산맥 지역에서 온 구티족의 칩입에 의해 약 200 년 만에 붕괴되고 이후 수메르인과 아카드인은 약 100년간 야만적인 구티족의 지배를 받게된다.이러한 구티족의 지배에서 수메르인과 아카드인을 해방시킨 것은 도시국가 우르의 지배자 우르헤갈이었다.우르헤갈의 치세는 불과 7년만에 그치고 우루남무가 구티족을 완전하게 몰아내고 메소포타미아 전역의  왕이 되면서 지구라트를 건축하고 법전을 편찬하여 통치의 기초를 삼았다.이 후 아들 슐기왕이 점차적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조직된 행정조직과 표준적인 법전을 통하여 통일 제국을 잘 다스리면서 수메르인의 제2의 번영기를 맞이했다.수메르인은 세계최초로 문자를 만들고 도시국가 모델을 창조한 지혜로운 고대인이었다.건축에 있어서도 지구라트라는 새로운 건축양식을 만들었다.지구라트는 인공적으로 세워진 신전으로 그 형태는 상층부로 갈수록 뾰족해지는 계단식으로 되어 있었다.이것은 신을 향한 수메르인의 종교적 열정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중심부에는 햇볕에 말린 벽돌로 지어졌다.벽돌의 표면은 불에 구운 것으로 여러가지 그림과 모자이크로 장식되어졌다.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은 바로 이 지구라트를 묘사한 것이다.수메르인들은 종교를 과학으로도 연결하였다.수메르의 신들은 각자 고유의 숫자를 갖고 있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천문학적.수학적 현상들에 대한 연구가 행해졌다.그래서 태음력이 만들어져 종교적 축제를 적합하게 조절하였다.산술의 기본 숫자는 60이었다.60은 수메르 최고의 신 안(An)의 고유 숫자이다.이렇게 고안한 60진법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와 시간이나 원의 각도를 나타내는데 쓰이고 있다.또한 수메르인들은 금이나 동으로 만드는 세공술에 매우  정교하였다.역사적 사건들을 양각하였다.특히 눈을 크게 뜨고 자연의 위대한 힘을 경외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기도하는 사람들의 입상을 매우 정교하게 양각하였다.그러나 BC 2,000 년경에 이르러 동쪽으로부터는 엘람인이 쳐들어오고 서쪽으로부터는 셈족 계통의 아모리인이 칩입하면서 수메르와 아카드의 통일제국 우르왕조는 무너지고 밀았다.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의 정치질서는 아모리인과 엘람인의 칩입으로 완전하게 파괴되어 갔다.수메르의 도시국가들이 남아 있기는 했으나 그 세력은 몹시 쇠퇴되었다.반면에 유프라테스강가의 마리(Mary)나 티그리스강가의 아쉬르 같은 도시들이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어 메소포타미아 세력의 중심은 북쪽으로 옮아갔다.

 

 

 

 

 

 

그리고 셈족 계통의 아모리인이 바빌론에 정착했을 당시에는 그 곳은 별로 중요한 지역은 아니였다.BC1800 년경에 아모리인 족장 수무아붐이 이웃 도시국가인 카잘루에게서 바빌론이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을 넘겨받아 터를 잡았다. 수무아붐이 세운 왕조가 그 유명한 고바빌로니아 즉 바빌론 제1왕조이다. 하지만 수무아붐은 스스로를 바빌론의 왕이라는 칭호로 높여 부르지도 못했다. 칭왕하지도 못할 정도로 바빌론이 워낙 작은 마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모리인은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 통일제국 우르왕조를 무너뜨리고 수메르와 아카드 문명을 흡수하여 바빌로니아 왕국을 건설하였다. 바빌론이 화려한 강대국으로 떠오른 것은 고바빌로니아의 제6대 왕인 함무라비왕 시절부터였다. 함무라비는 탁월한 외치와 내정 능력으로 작은 마을이었던 바빌론을 거대한 도시로 확장했다. 세수를 정비하는 한편 제대로 된 중앙집권제를 확립했고 엘람으로부터 독립을 이뤄냈으며 이신.라르사.키쉬.니푸르.우르 등 쟁쟁한 대도시들을 죄다 복속시켰다. 동쪽으로는 저 멀리 엘람까지 서쪽으로는 고아시리아를 정벌하면서 웬만한 지방들은 모조리 정복할 수 있었다. 함무라비는 활발한 정복 사업을 통해 혼란스러웠던 메소포타미아 남부를 재통일했고 이때 이후로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방은 바빌로니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함무라비왕의 40년이 넘는 재위 기간 동안 바빌론은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발전했다.바빌로니아인이 인류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은 함무라비 법전이다.함무라비 법전은 높이 8피트의 딱딱한 돌기둥에 새겨져 공포되었다.이 법전은 거의 4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이 보다 앞서 수메르인.아카드인들도 성문 법률을 갖고 있었는데 함무라비왕은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하여 세계 최초의 성문 법전을 편찬하였던 것이다.이 법전은 당시의 사회가 3개의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사제 및 세속 귀족들.일반시민계층인 상인 및 농민들.최하위계층인 노예들이었다.법조문은 각 계층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었으며 동일 계층 내의 모든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법앞에서 모두 평등하였다.고바빌로니아 왕조는 함무라비왕이 죽자 빠르게 무너졌다.메소포타미아 남부는 거대한 대평원 지대라 공격에 대단히 취약했다. 메소포타미아 최남단에는 시랜드 왕조가 들어서서 독립을 선포했지만 고바빌로니아 삼수일루나왕은 이를 막을 능력이 없었다. 한때 함무라비왕이 억눌러 놨던 고아시리아는 바로 반란을 일으켜 독립했고 고바빌로니아의 영향권은 수도 바빌론과 그 주변 일대로 쪼그라들었다.고아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 중부까지 쳐들어와 고바빌로니아의 영토를 갉아먹었다. 삼수일루나의 후계자였던 아비에슈흐왕은 시랜드 왕조를 다시 무릎 꿇리려고 시도했지만 역시나 실패했다.그의 뒤를 이은 왕들은 몰락한 바빌론에 만족한 채로 건물이나 개보수하는 것밖에 업적이 없었다. 결국 최후의 왕 삼수디타나왕이 BC 1550년경 인도유렵어족으로 오리엔트 최초로 철기를 사용한 히타이트인 무르실리 1세에게 대패하고 바빌론이 함락되면서 고바빌로니아는 함무라비 사후 150여 년 만에 허무하게 몰락하고 말았다. 바빌론을 기반으로 한 첫 번째 왕조였던 고바빌로니아 즉 .바빌론 제1왕조가 몰락하자 그 자리는 잠시 시랜드 왕조가 메웠다. 이때문에 시랜드 왕조를 바빌론 제2왕조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시랜드 왕조는 태생이 강하지 못해 얼마 못 가 동쪽의 자그로스산맥에서 발원한 민족이었던 카시트인들에게 밀려났다. 바빌론을 장악한 카시트인들이 세운 카시트왕조를 바빌론 제3왕조라고 부른다. 중바빌로니아라고도 불리는 카시트 왕조는 이전의 셈족계 아모리인이 세운 고바빌로니아나 훗날 들어설 셈족계 칼테아인의 신바빌로니아 비하면 인지도는 훨씬 덜하지만 사실 바빌론을 가장 오랫동안 지배한 왕조였다.무려 576년 동안이나 존속하면서 바빌론과 인근에 패권을 행사하였다.BC1450년경에는 남쪽으로 밀려갔던 시랜드 왕조의 목숨을 완전히 끝장내고 메소포타미아 남부를 재통일하는 업적을 이루었다. 576년 동안이나 존속한 바빌론 제3왕조인 카시트왕조가 멸망하고 난 이후 제10왕조 셈족인 신바빌로니아가 들어서기 전까지 무려 6개에 달하는 왕조들이 바빌론에 들어섰다. 이 역시 모두 바빌로니아라고 부른다.하지만 대부분이 단명한 왕조인 데다가 알려진 기록도 거의 없는 탓에 별다른 주목은 받지 못한다.그러나 셈족계 칼데아인 장군 나보폴라사르가 BC 620년 바빌론에서 궐기하여 신아시리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바빌론을 중심으로 한 제국을 재창건하면서 고바빌로니아 함무라비 대왕 이래 1,000년 만에 메소포타미아계 제국 중심의 정통 바빌론인 신바빌로니아 즉. 바빌론 제10왕조를 세우면서 제1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BC 605년에 승하하고 아들인 네부카드네자로2세가 신바빌로니아 즉. 비빌론 제 10왕조의 2대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즉위하자마자 옛 아시리아 제국의 잔재들을 철저하게 지우는 데 공을 들였다.신아시리아의 마지막 왕 아슈르우발리트 2세가 재기하지 못하도록 끝장내는 한편 아시리아 북부의 잔군들을 처리했으며 이집트와도 전쟁을 벌여 이집트 세력을 메소포타미아에서 완전히 몰아냈다.이어서 이집트 정복에 나서지만 정복에는 실패했다.그러나  중간에 걸리적 거리던 유대 왕국은 철저하게 짓밟고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왔는데 이때 일어난 사건이 유명한 바빌론유수이다.당시로서는 촌구석에 해당하던 이스라엘에 살던 유대인들이 바빌론에 잡혀와 에테멘앙카와 거대한 지구라트들을 보고 경악해 바벨탑 이야기를 생각해냈다는 일화가 잘 알려져 있다.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업적은 정복 사업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현 이란 지역의 메디아왕국과 결혼 동맹을 맺어 메디아 공주 아미티스를 왕비로 맞았다. 이후 고향을 잊지 못하는 아미티스 왕비를 위하여 세계7대불가사의로 알려진 바빌론의 공중정원을 지어 위엄을 과시했으며 에테멘앙카.이슈타르의 문.행진의 거리 등 수도 바빌론 전체를 전면 개보수했다. 왕은 바빌론에 가장 큰 신경을 많이 쏟았지만 바빌론뿐만 아니라 신바빌로니아 제국 내의 대다수 도시들에도 관심이 많았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재위기에 최소한 13개에 달하는 도시들이 완전한 리모델링을 걸쳐 아름다운 도시로 탈바꿈했다고 한다. 이처럼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건축과 문화.영토 확장 등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당대의 바빌론은 세계 최대의 메트로폴리스 즉. 세계의 수도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영광을 자랑할 수 있었다.명군이었던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43년에 달하는 기나긴 치세가 끝나자 신바빌로니아는 조금씩 몰락하게 되었다. 신바빌로니아가 멸망하자 아케메네스왕조가 몇백 년 동안 바빌론을 다스렸고 이후 바빌로니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국가는 다시는 등장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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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인의 문화유산

 

 

 

 

 

 

수메르인은 세계최초로 문자를 만들고 도시국가 모델을 창조한 지혜로운 고대인이었다.소리를 내자자마자 곧 없어지는 말을 영원히 보존하는 기록법으로 당시에는 종이가 발명되지 않아 점토판에 갈대로 만든 펜을 사용하여 문자를 썼다.처음에는 상형문자를 사용했다.그러나 상형문자는 표현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표현할 수 있는 대상도 제한적이었다.그래서 새롭게 창안한 것이 쐐기문자이다.이것이 바로 설형문자이다.점토판을 불에구어 마르면 단단해지기 때문에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었다.오늘날 학자들은 점토판에 기록된 문자를 해독하거나 연구함으로써 수메르의 역사를 조금씩 밝히고 있다.이런 의미에서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수메르인은 건축에 있어서도 지구라트라는 새로운 건축양식을 만들었다.지구라트는 인공적으로 세워진 신전으로 그 형태는 상층부로 갈수록 뾰족해지는 계단식으로 되어 있었다.이것은 신을 향한 수메르인의 종교적 열정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중심부에는 햇볕에 말린 벽돌로 지어졌다.벽돌의 표면은 불에 구운 것으로 여러가지 그림과 모자이크로 장식되어졌다.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은 바로 이 지구라트를 묘사한 것이다.수메르인들은 종교를 과학으로도 연결하였다.수메르의 신들은 각자 고유의 숫자를 갖고 있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천문학적.수학적 현상들에 대한 연구가 행해졌다.그래서 태음력이 만들어져 종교적 축제를 적합하게 조절하였다.산술의 기본 숫자는 60이었다.60은 수메르 최고의 신 안(An)의 고유 숫자이다.이렇게 고안한 60진법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와 시간이나 원의 각도를 나타내는데 쓰이고 있다.또한 수메르인들은 금이나 동으로 만드는 세공술에 매우  정교하였다.역사적 사건들을 양각하였다.특히 눈을 크게 뜨고 자연의 위대한 힘을 경외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기도하는 사람들의 입상을 매우 정교하게 양각하였다.수메르인이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에 정착한지 수백년이 지났을 때에 끔찍한 대홍수의 기습이 발생하였다.엄청나게 퍼부어대기 시작한 폭풍우는 한순간에 대홍수가 되어 성역을 단숨에 휩쓸어 버렸다.7일간의 대홍수는 온 나라를 쓸어내리며 초토화 시켰다.이 홍수의 전설은 니푸르 유적에서 발견된 점토판에 기록되어 있었다.1930년경 영국의 고고학자 레오나드 울리 경은 수메르 우르 유적지의 신전 조사가 끝나고 별 생각 없이 근처에 사방 2미터 넓이의 깊은 구멍을 파보았다.이미 파헤친 신전의 유적보다 훨씬 아래쪽에 두께가 3미터나 되는 점토층이 발견되었으며 그 밑에는 또 다른 주거지가 있었다.울리 경은 이 점토층을 기원전 3500년 경에 일어난 대홍수의 자취라고 추정하였다. 또 다른 유적지에서는 기원전 2500년 경에 일어난 대홍수로 퇴적된 두께 60센티미터의 점토층이 발견되었다.수메르인은 이러한 대홍수의 피해를 여러번에 걸쳐 피해를 극복하고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하면서 신전을 중심으로 거대한 성벽을 둘러싸고 그 바깥에는 도시를 에어싼 성벽을 축성하는 기술을 습득하였던 것이다.

 

 

 

 

 

 

 

 

 

 

수메르인의 밭은 하루 만에 돌아올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도시의 성벽 바깥에 펼쳐져 있었다.신전의 직영지와 도시 주민에게 활당된 소작지로 되어 있었다.여름에는 비가 거의 오지 않는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물을 운하나 저수지를 이용해 물을  끌어들여 보리와 밀을 재배하였다.따라서 관개농업이 무척 발달하였다.그 생산성이 무척 높았다.남겨진 기록을 보면 기원전 1700 년경 바빌로니아왕국시대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뿌린 씨앗의 100배에서 200배 까지 되는 수확량을 올렸다고 적혀 있다.수메르인보다 2000년 이나 뒤에 등장하는 고대 로마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시실리아섬에서도 뿌린 씨앗의 8배밖에 거두지 못했으며 중세의 영국은 3배에서5배 였다고 한다.수메르와 로마는 서로 같은 건조자대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수확량이 다른 이유는 무앗일까?우선 씨앗을 뿌리는 방법에서 차이가 있었다.로마에서는 사람의 손으로 씨앗을 뿌라는 반면에 수메르에서는 파종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씨앗이 골고루 뿌려진다.두마리의 소가 끄는 쟁기로 밭을 갈때 쟁기 위에 부착한 씨뿌리는 기구로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밭이랑의 간격이 50센티에서 55센티로 넒은 편이어서 씨앗의 양이 적게 들었다.1핵타르당 수확량의 차이도 크게 생겼다.이 의문도 니프로 유적에서 발견돤 점토판 문서에서 풀렸다.이것은 기원전 1700 년경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한 농민의 달력으로 1년 동안의 농사짓는 방법을 가르친 것이다.밭을 갈 때에는 물이 밭에 넘치지 않도록 관개와 용수로에 주의하라.보리 싹이 돋아나면 여신 닝키림에게 제사지내고 보리 싹 주변에 새들을 쫓아라.보리가 자라서 밭의 좁은 바닥을 가득 채우면 비로서 물을 주라.보리가 배의 돛대처럼 크게 자라면 두번째 물을 주라.만약 물을 준 보리가 붉은 색으로 변하면 보리가 사마니병에 걸렸다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알맹이가 꽉 찬 보리로 자라면 세번째 물을 주라.이런 식으로 농사를 지으면 작년보다 10분의 1은 더 많이 수확할 수 있을 것이다.이 방법은 현재 이라크 농법과 거의 다르지 않게 전수되었다.로마의 경우는 천수농업이고 수메르의 농업은 관개농업이다.밭에 물을 대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당시의 수메르인들은 터득하고 있었다.강물 속에는다양한 영양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수메르인은 해마다 물을 줌으로서 밭에 영양분을 공급한 것이었다.수메르인의 농업생산성을 보증하는 운하의 건설과 수리는 왕의 중요한 임무였다.건설된 운하는 밭에 물을 공급하는 수원이 될 뿐만 아니라 홍수의 위험을 예방하고 뱃길도 되었다.

 

 

 

 

 

 

 

 

 

수메르인들은 구리와 주석을 합금해서 만든 청동기를 사용하여 호미.써레.갈퀴.망치.땅을 파는 쟁기와 곡식을 베는 낫을 발명하여 농업생산량을 늘렸다.운송과 교역을 중요시했던 수메르는  바퀴를 이용하여  활용한 다양한 발명품들을 상용화했다.소가 끄는 썰매는 기원전 3000 년경 고대도시 우르에서 왕의 시신을 무덤으로 옮기는 운반용으로 사용되었다.또한 당나귀가 이끄는 전차를 만들어 정복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철저한 연구 끝에 구현된 전차는 오직 전투를 위해 중무장한 병기였다.바퀴를 사용한 전차나 수례는 수메르 왕실묘자에서 발견된 군기에서 확인되었다.수메르의 도시 국가들은 영토.천연자원.그리고 물을 위해 전쟁을 수시로 할 수 밖에  없었다.메소포타미아 남부자역은 대평원 지역이기 때문에 밖으로부터 칩입이 많아 성을 축성하는 기술.적을 막는 병기.전차등이 강성해야만 했다.수메르의 이러한 잦은 전쟁은 점차적으로 네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로 개조되었다.수메르인의 정치세력은 바빌로니아에 의해 소멸되었지만 그들이 자자손손 살아온 터전인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에서 다른 지배족속이 이끄는 사회체제속에 동화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수메르인들만의 고유한 생활방식으로 살아가면서 그들만의 역사를 보존하고 삶을 이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메소포타미아남부 수메르 자역에 해당하는 현재 이라크 남부의 토착  민족인 습지아랍인이 일정부분 수메르의 후예일 것으로 추정된다.사회 구조는 베두인에 가깝긴 해도 고대 수메르 문화의 갈대 집과 선박을 지금도 만들어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쿠르드족은 자신들이 수메르의 직계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쿠르드족의 근원이 고대 수메르어 guti 라든가 그 조상들이 수메르 지역에 뿌리내렸다는 기록이 발견되고 일부 어휘들이 수메르어와 겹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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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인의 문학작품

 

 

 

 

 

 

 

 

수메르인에게는 풍부한 문학적 감성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가득했다.수메르인의 홍수신화는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와 비슷하다.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기원전 586년에 나라를 잃은 유대인들이 당시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지배하던 바빌로니아에 끌려가 포로 생활을 할 때 그 곳에서 들은 수메르 홍수의 전설을 듣고 기억하였다가 고향으로 돌아가 기원전 400년 경에  <창세기>을 최종 편집하면서  <노아의 홍수>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수메르인들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정착을 한 후로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매년 마다 불규칙적으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범람하는 것이였다.따라서 홍수는 신이 노하여 그들에게 내리는 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따라서 장구한 세월을 통해 홍수에 시달린 수메르인들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홍수의 전설이 생겨나게 되었다.신들은 자신들이 창조한 인간들이 신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자 회의를 하여 대홍수를 통하여 모든 인간을 없애기로 하였다.그러자 이 가혹한 처사에 불만을 품은 신이 몰래 인간들에게  신들의 결정을 알려주어 인류의 멸망을 구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그 신이 선택한 인간은 바로 왕이자 사제였던 지우스드라였다.그 신은 신들의 결정사항을 알려주며 재물을 아끼지말고 배를 만들어 가족과 모든 생물의 종자를 싣고 7일간 계속되는 홍수를 이겨내고 살아남으라는 말을 전했다.신의 말대로 배를 만들고 준비를 마치자 대홍수는 시작되었다.지우스드라는 여섯날을 홍수와 폭풍우속에서 보내고 7일째가 되자 폭풍우는 멎었다.지우스드라는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린 뒤에 배가 머무를 곳을 찾아 나섰다.배는 흘러 흘러 산꼭대기에 닿았다.지우스드라는 물이 빠졌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우선 비둘기를 날려보냈다.그러나 비둘기는 앉을 곳을 찾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다음에는 제비를 날려보냈지만 다시 돌아왔다.마지막으로 큰 까마귀를 날려보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다.물이 다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된 지우스드라는 가족과 함께 배에서 나와 산꼭대기에서 모든 신들에게 제사를 드렸다.이상은 수메르인이 기록으로 남긴 홍수 신화이다.이것은수메르인들이 홍수에 시달리면서 살아온 삶속에서 생존했던 지난날을 기리면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신에게 감사하고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라는 교훈을 후손들에 남겨주기 위한 이야기를 신화로 만든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렇듯이 수메르인들의 문학작품에는 주로 신화를 토대로 한 것이였다.이런 작품들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우르왕조의 우르크시 왕이었던 길가메쉬에 관한 것이다.먼 옛날 유프라테스강가에 있던 우루크시에는 길가메쉬라는 용맹한 왕이 있었다.그는 전쟁을 잘하였으나 백성들을 억압하고 괴롭혔다.폭정에 시달린 백성들은 참다 못해 신들에게 기도를 올렸다."신들이여!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시어 저 폭악한 길가메쉬왕을  심판하여 주십시요!"이렇게 간절하게 백성들의 기도를 들은 신들은 회의를 열어 길가메쉬보다 더 강하고 용감한 인간을 만들어 오만한 길가메쉬의 버릇을 고치도록 결정하였다.신들은 점토로 엔키두라는 인간을 만들어 야수들이 사는 숲에 보내어 자라게 했다.엔키두는 야수와 함께 지내면서 강하고 용감하게 성장했다.이런 소식을 들은 길가메쉬왕은 한 가지 꾀를 내었다."엔키두는 야수들과 같이 자랐으니 여자와 사랑을 나누는게 얼마나 좋은지 모를거다.그 놈이 여자와 사랑에 빠지면 제가 할일이 무엇인지 잊고 말거야"하면서 부하에게 명령하여 한 절세의 미녀를 엔키두가 사는 숲 근처로 보내도록 하였다.그 미녀는 며칠을 기다리다가 엔키두를 만났다."엔키두님! 제가 예쁘지 않으세요?제가 마음에 드시면 사랑해주세요"그러자 짐승이나 다름없는 엔키두는 난생 처음보는 미녀의 유혹에 빠져버렸다.엔키두는 몇 달 동안 미녀와 사랑을 나누며 세월을 보냈다.그러자 천상의 신들은 이 사실을 알고 엔키두가 제 정신을 차리도록 하였다.정신을 번쩍 차린 엔키두는 미녀를 떨치고 일어나 길가메쉬를 혼내주려고 우르크시로 향했다.엔키두가 우르크시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는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마침 신전에 제사를 드리려가는 길가메쉬욍의 행렬이 신전 앞에서 멈추자 왕이걸어나왔다.엔키두는 왕의 앞으로나와 가는길을 막아서며 "길가메쉬여!그대는 백성을 너무 괴롭혔오.이제 내가 신들을 대신하여 그대를 벌 줄 것이니 나의 도전를 받으시오"그러자 길가메쉬왕도 쾌이 승낙하고 대결을 시작했다.두 용사의 대결은 쉽사리 우열이 가려지지 않았다.막상막하였다.길가메쉬는 점차 엔키두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엔키두여!우리가 이렇게 싸울 필요가 어디에 있나.나는 자네가 마음에 들었네.내가 마음을 고쳐먹을 테니 우리 서로 친구가 되세"그러자 엔키두 역시 대결을 하는 동안 그의 용감한 것에 감탄하고 " 좋아! 나도 자네가 마음에 들었다네." 그 후로 두 영웅은 서로 힘을 합하여 갖가지 모험을 하게 되었다.그 들의 모험은 더욱 과감해져 신들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특히 여신 이슈탈의 황소를 죽인 사건은 신들의 노여움을 크게 사게 되어 엔키두는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길가메쉬는 엔키두가 죽자 인생의 무상함에 깊은 회의를 느켰다.그는 얼마 후 영원한 생명의 비밀을 찾아 길을 떠났다.그는 갖은 고생 끝에 영원한 생명의 비밀을 알고 있는 슈롯파크라는 마을에 사는 우트나피슈틴이라는 노인을 만나게 된다.그에 끈질기게 비밀을 알려달라고 간청하지만 노인은 거절하였다.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간곡하게 간청을 계속하자 노인은 고집을 꺾고 생명의 비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우트나피슈틴 노인은 자신이 겪었던 홍수이야기를 길가메쉬에게 들려주며 불사의 약초가 있는 곳을 가르켜주었다.노인이 가르켜준 곳에서 어려움을 이겨내고  간신히 약초를 구한 뒤 기쁨에 넘쳐 우르크시로 향했다.우르크시 근처에서 해는 이미 저물어 하룻밤을 저물고자 주의를 살피다가 샘물을 발견하였다 .이 곳에서 하루밤 지내고 가려고 생각했다.길가메쉬는 우선 목욕을 하려고 옷을 벗어 불사의 약초와 함께 물가에 놓아둔 채 샘물 속으로 들어 갔다.그때 마침 뱀 한마라가 약초의 냄새를 맡더니 그것을 먹으려고 달려 들었다.그것을 본 길가메쉬는 물 속에서 뛰쳐 나왔으나 뱀은 이미 약초를 먹어치운 후였다."아! 이것이 모든 인간의 운명이란 말인가?"길가메쉬는 엔키두가 죽었을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 번 인간의 숙명을 한탄하며 우르크시로 돌아왔다 그 후 그는 불멸의 영생보다는 이 세상에서의 줄거움을 찾으면서 평생을 보냈다고 한다.길가메쉬의 서사시는 인류 최초의 문학 작품으로서 그 내용은 오늘날에도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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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  수메르 도시국가

 

 

 

 

 

 

 

 

메소포타미아는 수메르인의 문명이 토대가 되었고 아카드·아무르인들의 문명이 가미되었다. 화폐는 쓰이지 않아서 물물교환이 이루어졌다.B.C 2700 년경에  수메르의 정치사회구조는 귀족. 평민.노예로 구성되었다. 왕.왕족. 고위 관료.고위 성직자들로 구성된 귀족들은 정치권력과 거대한 토지를 소유했고 높은 신분을 유지했다. 한편 평민들은 토지의 소유나 처분이 가능했고 신분을 살 수 있었고 전쟁포로나 외지인. 범죄자 그리고 채무자들 거의 대부분은 노예였다. 또한 채무 때문에 노예가 된 사람은 3년 후에 일반인으로 복귀가 가능했다.노예는 주인에게 계속 복종해야했다. 메소포타미아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에 의한 비옥한 퇴적평야로서 수메르인은 역사의 시초에 이미 남부에 정주하여 각지에 소도시를 중심으로 한 지역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수메르인의 왕은 주신(主神)의 하나인 엔릴의 아들이라 칭하여 신으로서 숭배받았다.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종교는 현세적 다신교로서 사후세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점성술도 현세의 행복을 기원하는 의미로서 발전하였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의 불규칙적이고 잦은 범람은 참혹한 재앙을 가져왔고 개방적인 지형은 끊임없는 외적의 침입을 불렀다.이러한 자연 환경은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세계관에 영향을 끼쳤다. 자연의 이득보다는 재앙을 극복하는데 힘써야 했던 수메르인들은 삶도 지극히 현세적인 삶을 꾸려 나갔고 사후 세계에 대해서는 거의 희망을 갖지 않았다. 문화적으로도 암울하고 비관주의적인 특징이 강하였다. 그들이 갖고 있는 신에 대한 생각과 현세적인 가치관은 길가메시 서사시에 잘 나타나 있다. 근년에 와서 고대사에 관한 많은 새로운 지식이 더해짐에 따라 인류의 가장 오랜 문명을 쌓아올린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이미 BC 3,500 년경에 놀랄 만한 고도의 기술이나 물질문명이 결실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문학·미술·종교 면에 있어서도 그 소박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인간성의 깊은 이해를 나타내는 걸작 또는 제신(諸神)에 대한 신앙을 나타내는 갖가지 유품들이 알려지게 되었다.

 

 

 

 

 

 

 

 

 

 

 

수메르 초기도시는 하천 유역을 따라 발달하였으며 우르.우르크.우바이드.움마.라가시와 같은 도시국가들이 이 시대의 중심지 역할를 했다.이들은 각각 독립된 도시국가로 운영되고 자신들의 신전과 신이 있었다.이러한 도시국가들은 인류 최초의 정주생활을 정착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정치 체제와 사회구조의 발달로 이어지면서 도시국가들은 서로 교류하면서 문화를 발전시켰다.수메르의 도시국가들 중에는 화려한 번영을 누려 남부메소포타미아 지역을 광범위하게 정복한 경우가 많았다.움마라는 도시국가는 루갈작게시왕이 지중해까지 이르는 세력을 펼치기도 하는 융성을 누렸지만 수메르인의 도시국가는 북방으로부터 밀려 들어온 아카드 칩입에 의해 무너지고 만다.수메르 문명의 가장 위대한 역사적 가치는 바로 문자발명이었다. 기원전 3,400 년경 세계최초의 문자 체계인 쐐기 문자를 만들었다.처음에는 단순한 기록용 기호로 사용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다양한 용도로 발전하게 되었다.점토판위에 새겨져 세금.거래.법률 등 행정적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으나 이후 지식과 정보의 축적이 가능하게 했고 역사를 기록하는 기점을 마련했다.수메르인들은 문자를 통해 서사시와 같은 문학 작품을 남겼으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길가메시 서사사이다.인류 최초의 문학 작품으로서 그 내용은 오늘날에도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이러한 문자 체계는 이후 아카드와 바빌로니아 같은 메소포타미아의 다른 문명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이 지역 전반에서 사용돠었다 특히 페니키아인은 수메르 쐐기문자를 간단하게 하여 알파벳을 만들었는데 이 페니키아 문자가 오늘날 알파벳의 시조가 되었다.

 

 

 

 

 

 

 

 

 

 

 

 

 

 

수메르인의 문명은 법과 질서가 확립된 조직사회였다.자신들의 도시국가를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법을 제정했다.인류 역사상 가장 초기의 법체계 중 하나로 왕들이 이 법을 통해 도시를 다스리며 정의와 공정을 구현하려고 했다.수메르 왕 우르남무는  이민족인 구티족을 완전하게 몰아내고 수메르인과 아카드인의 통합제국을 만들고 수메르의 제2 전성기를 열면서 세계 최초의 성문화된 법전을 만들었다.범죄에 대한 처벌.계약.재산권에 대한 규정을  명시하고 이를 통해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이러한 법 체계는 이후 함무라비 법전과 같은 메소포타미아의 다른 법전들의 기초가 되었다.특히 우르남무는 대규모 지구라트를 건설하여 위엄을 보였다.지구라트는 도시국가의 중심에 여러 층으로 쌓아올린 탑 모양의 신전을 말하는 것으로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은 바로 이 지구라트에 관한 것이다.우르남무왕의 우르왕조도 기원전 2,000 년경에 이르러 동쪽으로부터는 엘람인이 칩입해 들어오고 서쪽으로부터는 셈족 계통의 아모리인들이  칩입으로 인해 무너져 내렸다.이후에 수메르인들은 정치적 세력으로서는 역사에서 사라졌으나 그 문화는 후세에 전해져 내려왔고 수메르어는 중세의 라틴어와 함께 문학어와 종교어로서 이후 2,000년 이나 계속하여 사용되었다.수메르 문명은 단순한 고대 문명의 하나가 아니라 인류 문명의 출발점이었다.수메르인들의 도시국가체계.쐐기문자.법 제도는 오늘날 현대사회의 기초를 이루고 그들이 남긴 문화 유산은 우리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문학적 전통에서 휴머니즘을 이어받고 창의력과 지혜는 인류 역사에 깊은 공헌을 남겼다.메소포타미아의 유산은 오늘날 우리곁에 남아 여전히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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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문명의 발생 메소포타미아 수메르문명

 

 

 

 

 

 

 

인류는 신석기 농업혁명의 융성을 바탕으로 기원전 3,500 년경을 전후하여 청동기사용.도시의 발생.신분과 계층의 발생.국가의 출현.종교의 태동.문자의 사용 등으로 문명사회로 진입하였다.큰 강을 이용한 관개 농업이 발달함에 따라 생산이 증대하고 인구도 번창하였다.작은 촌락의 모습에서 점차적으로 도시의 모습을 갖추고 규모가 커지면서 서로 협동하고 통합되면서 사회의 조직과 제도가 정비되고 마침내 도시가 성립되어 도시들을 중심으로 국가가 형성되었다.그 중에서 가장 먼저 문명 단계에 들어선 것은 기원전 3,500 년경에 시작된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이었다.나일강 하구와 메소포타미아 이 두 지역 사이에 펼쳐져 있는 동부 지중해 연안의 이른바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최초의 도시가 나타났고최초의 문명이 태동되었다.오늘날 중동지방의 두 지역 사이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인류가 일정한 지역에 정착하여 농경을 중심으로 한 사회를 발전시켜나갔다.비옥한 초승달 지역은 서쪽으로 지중해와 맞닿고 남쪽으로는 아라비아 사막과 접하며 북으로는 타우르스산맥. 그리고  동쪽으로는 자그르스산맥을 경계로 하는 지역이다.이 지역 내에서도 지중해 연안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지역은 대단히 비옥하였다.이 지역을 "강 사이의 땅"이란 뜻으로 메소포타미아라고 불렀다.이러한 메소포타미아의 남부지역에 가장 일찌기 들어온 민족은 수메르인이었다.수메르인들은 이 후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나타나게 될 여러 문명들의 기반이 되는 문명을 만들어 냈다.메소포타미아의 역사는 끊임없는 이주와 칩입의 연속이었다.새로운 민족이 이주해 이전의 문명을 파괴하는 듯 했지만 나중에는 우수한 수메르 문명의 핵심을 받아들이고 그 위에 자신들의 새로운 문명을 결합하여 보다 더 나은 문명으로 발전하였다.수메르인들은 당시에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다.이때의 문자는 상형문자이었다.이 문자는 쓰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을 뿐만 아니라 표현할 수 있는 대상도 한정돠어 있어 문명의 발전에 깊은 영향을 주기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였다.따라서 수메르인들은 쐐기 모양의 표식으로 글자를 나타낸 설형문자를 만들어 냈다.많은 전설과 영웅들의 일화 등을 영구히 기록하기 위해 갈대 줄기를 펜으로 삼아 점토판 위에 설형문자를 적고 불에 구워 보존하였다.이를 다시 페니키아인들이 설형문자를 간단하게 하여 알파벳을 만들었는데 이 페니키아 문자가 오늘날 알파벳의 시조가 되었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두강은  범람 시기가 매우 불규칙하여 예측하기가 어렵고 범람 규모도 다양하였다.범람 후에는 토양이 늪지대로 변했는데 이러한 땅을 적절히 이용하려면 배수를 잘해야만 했다.또한 여름에는 가뭄으로 몹시 메말라기 때문에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는 충분한 관개시설이 필요했다.수메르인들은 수로와 저수지를 만들어 범람하는 강물을 잘 다스려 농업을 발전시켰다.농경산업이 발달하면서 인구가 증가하였다.수메르인들의 도시는 규모가 카지고 이 도시들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문화와 기술을 발전시켰다.바퀴를 만들어 운송수단의 혁신을 가져왔고 야생당나귀가 끄는 전차를  전쟁시에 이용하였다.구리와 주석을 합금하여 청동을 만들면서 청동기문화의 혁신을 가져왔다.태음력을 사용하고 60진법에 의한 계산법도 창안하였다.천체의 운행을 보고 점성술과 천문학이 발달하였다.메소포타미아의 예측할 수 없는 기후는 수메르인들에게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가져오게 했는데 이러한 영향으로 자연에 대한 숭배 현상이 유행하고 이것이 종교 의식으로 태동되었다.각 도시국가들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었으며 시민 집회는 신들의 모임을 모방하였다.이러한 종교관은 특정한 지배 계급으로 등장한 사제들의 지배권을 합리화시켜 주었다.도시국가의 모든 토지는 신의 소유이고 사제는 신과 인간 사이의 중계자이므로 사제들이 모든 토지를 관리할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대 부분의 수메르인에게는 받아들여졌다.수메르인의 도시국가들에서는 농경.교역.전쟁 등에 관한 중요한 결정들을 내리는데 종교지도자들의 발언권이 강해지게 되었다.수메르의 주요 도시국가들에서는 기원전 2700 년경에 이르러 세습적인 왕권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기원  역시 신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생각되어졌다.수메르 도시국가들 중에는 화려한 번영을 누려 남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광범위하게 정복한 경우가 많았다.그러나 결국 수메르인의 국가는 북방의 악카드의 칩입에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고 만다.이후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아카드.바빌로니아 등이 지배하면서 수메르의 정치적세력은 소멸하게된다.그러나 수메르인들이 이루어 놓은 문화와 언어.제도와 기술은 그대로 전수되어 새로운 세력의 문화에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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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는 지성인이라는 뜻으로 동물학상 오늘날 우리와 같은  가장 가까운 인류를 가리키는 학술상의 용어이다.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2만년전에서 1만년 전으로 문화적인 진화를 시작하였다.호모사피엔스가 나타나기 이전 인류는 2백만년이라는 유구한 세월에 결쳐 생태학적인 진화를 거쳐야 했다.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인류의 근원은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 약 2백만년전에 지구상에 나타났다.돌조각을 깨서 연장으로 삼아 사냥을 한 최초의 인류이지만 동물에 가깝다.이들은 직립해서 걷긴 했으나 두뇌가 원숭이 것과 거의 비슷했고 키도 1미터 30센티 정도에 불과했다.그후 100만년 전에서 50만년 전에 이르러 오늘날 인간의 모습과 비슷한 직립인간 호모에레투스(Homo Eretus)가 나타났다.호모에레투스 화석은 북경에서 발견되었다.이들은 돌을 갈아서 손도끼로 사용하고 불을 사용하였다.호모에레투스 후예는 네안테르탈인이었다.두뇌의 크키는 호모사피엔스 크기와 비슷했지만 두개골 모습이 원숭이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다.그래도 이들은 죽은자를 매장하는 관습을 갖게되고 정신적으로도 호모시피엔스에 훨씬 가까워졌다.네안테르탈인 화석은 19세기 독일에서 발견되었다.이후 약 2만년전에 비로서 진정한 인간의 모습으로 호모사피엔스가 나타났다.

 

 

 

 

 

 

 

 

 

 

 

 

이들의 화석은 프랑스 크로마뇽 동굴에서 발견되었다.오늘날 우리 인간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머리와 얼굴 모양을 하고 있다.두뇌의 크기.치아.척추 등도 다르지 않았다.이렇게 오늘날 우리 인류의 조상인 호모사피엔스가 되기까지는 2백만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이에 비하면  이후 인간의 문화는 빛의 속도로 2만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에 다양한 경험과 풍부한 상상력을 통하여 오늘날의 풍족한 삶을 창조해냈다.2만년 전에 인간은 겨우 사냥이나 식물채집 정도로 삶을 영위했다.그러나 약 1만년 전부터는 한 곳에 정착을 하고 동물을 가축하면 식물을 재배하게 되었다.바로 이때부터 인류의 문명은 크게 융성하게 되었다.이른바 신석기 농업혁명시대로 큰 변혁의 시대를 가져오게 됨으로서 움집을 짓고 촌락을 이루면서 농경문화로 인한 생산력의 발달로 식량이 풍부해지고 인구도 증가하게 되었다.식량을 저장하고 음식을 담기위한  토기가 만들어졌으며 북과 베틀이 발명되고 옷감을 만들어 추위로부터 보호하는 생활문화가 정착되었다.이때의 농경문화는 비료를 사용하지 않는 자연적인 기후현상에만 의존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토지의 양분이 고갈되어 생산력이 저하됨을 알았다.따라서 정착되어온 땅을 버리고 새로운 촌락을 찾아 옮기는 이주형태의 아주 작은 촌락형태의 생활이었다.이러한 형태는 메소포타미아.이집트.인도.중국.유렵 의 초기사회에서 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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